공연
[마이데일리 = 허설희 기자]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 속 흡혈귀는 우리가 흔히 아는 흡혈귀와는 조금 다르다. 흰 얼굴에 빨간 입술,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흡혈귀의 모습보다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흡혈귀들이 인간의 비애를 전한다. '멋짐'보다 '현실'을 표현한다.
신춘문예 희곡부문을 수상한 바 있는 김나정 작가의 작품을 무대로 옮긴 새로운 감성의 창작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는 불멸의 존재이자 루마니아의 로열 패밀리였던 뱀파이어 가족이 생계를 위해 한국의 어느 유원지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그린다.
불사의 몸을 가진 흡혈귀 가족에게도 인간세상에서의 삶과 사랑은 힘겨움 그 자체이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를 무대 위에서 유쾌하고도 간결하게 풀어내고 있다.
'상자 속 흡혈귀'는 앞서 밝혔듯 대중이 흔히 아는 흡혈귀와는 다른 모습의 흡혈귀를 그린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표현되며 대중에게 각인된 흡혈귀의 이미지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불멸의 존재. 때문에 겉모습이나 행동 역시 대부분 신비롭게 표현됐다.
그러나 '상자 속 흡혈귀'는 다르다. 불멸의 존재지만 치열한 인간 세계에서 그들의 존재는 매우 작다. 현실을 마주한 그들은 살아 나가기 위해 인간과 같은 길에 놓인다. 그들에게는 불멸만 있을 뿐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없는 것이다.
"피만 먹고 살 수 없다"는 말에서 알 수 있는 인간 세계에서 살려면 기본적인 의, 식, 주가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돈도 없고 능력도 없다. 유원지 공포체험관에서 사람들을 놀래키는 흡혈귀 역을 하지만 유원지는 문닫힐 위기에 놓였고, 이들도 쫓겨날 처지다. 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인간을 물 수 없으니 병원에서 헌혈피를 훔치거나 동물들의 피를 겨우 마신다. 치명적인 매력이 표현되기에는 너무도 현실이다.
또 이들은 독자적인 인물로 표현되지 않는다. 흡혈귀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는 만큼 더욱 현실에 놓인 이들의 고충이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각기 다른 성격의 엄마 쏘냐, 아들 바냐, 딸 아냐를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이 표현되기도 한다.
영화로웠던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엄마 쏘냐, 우유부단한 몽상가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다정다감한 남자 흡혈귀 바냐, 흡혈귀 가족 중 가장 현실적이고 인내심이 강한 미녀 흡혈귀 아냐가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다만 현실 이야기를 너무 많이 다루려다 보니 다소 지루하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과한 인물 설정과 멀티 역이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부분이 아쉽다. 세련된 표현보다는 현실 그대로를 묘사하는 설명이 지칠 때도 있다.
하지만 '상자 속 흡혈귀'가 새로운 이야기에 도전해 다른 이야기를 전하려 한 것만은 분명하다. 새로운 시도에 걸맞은 패기가 돋보이는 것도 이 때문. 배우들 역량 역시 뛰어나다. 고유한 캐릭터를 비트는 재치가 돋보이며 다채로운 악기 편성은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 공연시간 110분. 오는 12월 31일까지 서울대학로 SH아트홀. 문의 02)744-5442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 공연 이미지. 사진 = 곽경훈 기자 kphoto@mydaily.co.kr]
허설희 기자 husullll@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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