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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홀로코스트 비극을 다룬 영화 ‘사울의 아들’은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시체처리반 ‘존더코만도’로 일했던 사울(게자 뢰리히)의 이야기를 그린다. 유대인은 가스실로 보내진 후 화장을 거쳐 한줌의 재로 변한다. 존더코만도는 가스실을 닦아내고, 시체를 나르고, 화장을 하며, 수북하게 쌓인 유골을 수레에 싣고 삽으로 퍼내 강가에 뿌린다. 존더코만도 역시 오래지 않아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600만명 이상의 유대인이 나치의 만행에 희생됐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에 서정시가 가능한가?”라고 물으며 홀로코스트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했다.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공장’이었다. 여기서 인간의 생명은 몇 단계를 거쳐 죽음으로 변한다. 나치는 유대인 시체를 ‘토막’ 또는 ‘부품’으로 불렀다. 그들은 왜 시체 또는 시신으로 부르지 않고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까.
‘무사유’다. 생각하지 않는 것.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무사유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독일의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의 체포, 강제이주를 계획·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독일 패망후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 이스라엘 모사드에 의해 체포돼 이스라엘 법정에 섰다.
한나 아렌트는 ‘명령수행자’에 불과해 보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그의 세가지 무능성에 충격을 받았다. 아이히만은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을 보였다. 그는 “무사유가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경고했다(그러나 훗날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 예루살렘 재판 이전의 아이히만은 항상 유대인을 독일의 적으로 간주했으며 유대인 절멸을 지지했던 신념에 찬 나치였다. 그렇다고 해서, 한나 아렌트의 ‘무사유’ 개념의 중요성이 반감되지 않는다).
나치는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 언어 규칙을 만들었다. 사람과 사물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언어규칙은 현실에 대한 감각 마비를 가져온다. 나치는 유대인 학살을 ‘최종 해결책’으로 명명했다. 이밖에 ‘완전 소개’ ‘특별 취급’ ‘재정착’ 등의 언어를 사용하며 학살, 살해, 죽음과 같은 ‘실재’와 거리를 두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두고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그와 같은 사람들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살상과 거짓말에 대한 그들의 오랜 ‘정상적인’ 지식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갈파했다. 나치가 유대인 시체를 토막과 부품으로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역사상 최악의 학살은 사람을 사람으로 부르지 않는 과정 속에서 발생했다. 누군가를 정확하게 부르지 않는 것은 ‘인간다움’을 포기한 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도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한국인을 포함하여, 특정 지역과 인종과 성을 비하하는 단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한다. 그와 같은 말을 입에 담는 순간부터 우리는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프란츠 카프카는 “그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야 그 삶이 우리에게 온다. 그것이 삶이라는 마술의 본질이다”라고 했다.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는 것은 인간다움과 삶의 본질에 접어드는 첫걸음이다.
[사진 제공 = 그린나래미디어]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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