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그물을 던진다. 남자는 속물인데, 대체로 비루하고 던적스럽다. 현미경을 들이대고 남과 여의 심리를 탐구하는 홍상수 감독은 최근에 여성의 입장을 더 도드라지게 표현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 이어지는 ‘여성 독립 2부작’으로 보인다. 남자 또는 세상의 그물은 여성을 포획하지 못한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민정(이유영)은 소문만 듣고 자신을 채근하는 영수(김주혁)에게 ‘쌍둥이 마법’(물론, 쌍둥이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을 걸어 오해를 풀어낸다. 민정은 영수와 친구들이 던졌던 그물에서 유유히 빠져 나간다. 한쪽 다리를 절고 있는 영수의 모습은 그의 사랑이 균형이 맞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민정은 이제 헛소문과 오해의 장막을 거둬내고 영수와 마주 앉는다. 당신 자신으로.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김민희)는 유부남 영화감독 상원(문성근)과 사랑에 빠졌다가 이제 막 헤어졌다. 독일에서 아는 언니 집에 머무르던 그는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로부터 “지금 몇 시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영희는 마침 시계가 없었다. 그는 해변에 있다가 그 남자에 등에 업혀 어디론가 사라진다.
2부에서 영희는 강릉에 사는 지인들과 술자리를 갖는다. 술에 취한 영희는 명수(정재영)에게 “사랑을 못하니까 다들 삶에 집착하는 거잖아요. 그거라도 얻으려고. 다 사랑할 자격 없어요”라고 쏘아붙인다. 그는 자신이 진실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영희는 자신을 응원해주는 천우(권해효), 준희(송선미)와 호텔에 투숙한다. 검은 색 옷을 입은 남자가 유리창을 닦고 있는데,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다. 강릉 해변가를 찾은 영희는 어떤 사람의 얼굴을 모래사장에 그려놓은 뒤에 눕는다. 깜빡 잠이 든 그는 상원의 영화팀 식구들과 술자리를 갖는 꿈을 꾼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 감독 영화 제목 가운데 가장 직설적이다. 밤은 어둠이고, 죽음이다. 반면 바다를 곁에 둔 해변은 생명이다. ‘밤의 해변’은 죽음과 삶의 경계이다. 영희는 죽음과 삶이 교차하고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해변에 ‘혼자’ 있다. 영희는 필사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중이다.
이 영화에서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사랑을 잊으라고 말하는 쪽은 남자들이다. 강릉의 천우와 명수는 술자리에서 어느 시인의 시를 읊는다.
벗어야 하리라.
답답한 사랑도
벗어 던져야 하리라
꽉찬 그리움도
훌훌 씻어버려야 하리라.
만나지 못해 발동동
만나서 더욱 애달픈 아픔도
미련없이 잊어야 하리라
툭! 벗어 던져야 하리라.
이 시를 읽는 행위는 영희에게 그 남자를 잊으라고 권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원도 안톱 체홉의 <사랑에 관하여> 한 구절을 읽는다.
“헤어질 때가 온 것입니다...사랑을 할 때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선한 행동인가 악한 행동인가라는 분별보다는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습니다.”
상원은 영희에게 이제 그만 잊자고 말하는 중이다. 그에게 사랑은 과거형이다. 그러나 영희는 꿈 속에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희의 사랑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다. 이 영화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사신(死神)’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사신은 독일 해변에서 쓰러진 영희를 업어 어디론가 뛰어가고, 강릉 호텔에 나타나 주위를 서성인다. 죽음이 자신의 곁에 가까이 와 있더라도 진실된 사랑을 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사신’이 아니라면, 타인의 사생활에 호기심이 많은 ‘대중’을 뜻할 수도 있다. 그 남자는 호텔 유리창을 닦으며 영희와 지인의 삶을 투명하게 관찰한다. 그러나 영희는 타인이 보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사랑은 당신 자신이 하는 거니까. 1부에서 그 남자의 등에 실려갔던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현재)은 맞으니까.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최근작 두편의 제목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 자신이 지금은 맞다.
[사진 제공 = 전원사]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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