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마이데일리]
기고: 요시자와 히로히사(吉澤公寿)
마리 로랑생 뮤지엄(Musée Marie Laurencin) 관장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랑이 끝나고 독일인 남편 오토와 결혼한 마리 로랑생은 또 다른 절망을 경험하게 된다.
1914년 6월 22일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뒤 불과 6일 만인 28일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군대가 밀파한 자객의 총탄에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1차 세계대전 발발의 시작이었다.
결혼 후 한 달 만에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고 자신들의 조국인 프랑스와 독일이 적국이 된 상황에서 두 사람은 스페인 망명길에 오른다. 하지만 망명의 결과는 비참했다. 알콜 중둑 증세를 보였던 남편 오토와 낮선 스페인의 환경으로부터 고통스러워 하던 마리 로랑생은 일본에서 '잊혀진 여인'으로 의역된 시 '진정제'를 써 자신의 괴로움을 노래한다.
진정제 [잊혀진 여인]
-마리 로랑생-
지리 하다고 하기보다 슬퍼요
슬프다기 보다
불행해요
불행하기보다
병들었어요.
병들었다기보다
버림받았어요.
버림받았다기 보다
나 홀로.
나 홀로라기 보다
쫓겨났어요.
쫓겨났다기 보다
죽어 있어요.
죽었다기 보다
잊혀졌어요.
결국 남편 오토와 이혼한 뒤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작품 활동에만 몰두하게 된 마리 로랑생은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인정받아 1920년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초상화 작가가 된다. 미국 화장품 재벌인 헬레나 루빈 스타인을 비롯해 보몽 백작 부인 등 전 세계 사교계의 부호와 명사들의 작품 주문이 밀려들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명품 브랜드인 샤넬의 창립자이자 전설적인 디자이너여였던 코코 샤넬 역시 이 중 하나였다.
로랑생과 샤넬은 한 발레 작품의 무대디자인과 의상을 각각 맡게 되면서 처음 만나게 된다. 사생아 출신이던 로랑생과 어린시절 수녀원에서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샤넬은 동갑의 나이와 비슷한 경험으로 공감대를 쌓게 된다. 로랑생이 무대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무렵, 샤넬은 그녀에게 자신의 초상화 제작을 주문한다.
로랑생은 샤넬의 의상이 일반인에게 소개된 해이기도 한 1923년에 이 초상화를 그렸다. 작품 의뢰를 받은 뒤 마리 로랑생은 코코 샤넬의 의상실을 몇 번이고 찾아가 모델을 스케치하면서 공을 들인다. 그러나 최종 완성된 작품을 받아본 코코 샤넬이 마리 로랑생의 작품을 맘에 들지 않고 결국 작품 인수를 거절한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지앵으로서의 자부심이 높았고 작가로서도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마리에게 코코샤넬의 이런 행동은 무례한 일로 비춰졌다.
결국 마리 로랑생도 작품을 수정해 코코샤넬에게 되돌려 보내지 않았고 이 작품은 마리 로랑생이 소장하고 있다가 훗날 그녀가 타계한 뒤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귀속된다. 코코 샤넬이 인수하기를 거부했던 초상화가 마리 로랑생의 대표작이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국제 사교에서 유명인이 된 마리 로랑생은 이후 회화 이외의 다양한 예술 분야까지 자신의 작업 반경을 넓히게 된다. 1924년에는 디아길레프가 제작한 발레 '암사슴들'의 의상과 무대 디자인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대표 실존주의 작가 앙드레 지드가 쓴 '사랑의 시도'를 비롯해 오페라로 더 잘 알려진 알렉산더 뒤마의 '춘희',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 등의 북 커버와 일러스트도 담당하게 된다.
마리 로랑생은 자신의 재능을 개화시켜 여성의 잠재능력을 세상에 보여주었고 많은 천재적인 남성 예술가들의 틈바구니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그것은 희비극이 교차했던 자신의 삶과 1·2차 세계대전의 슬픔 속에서 그림을 통해 부드럽게 세상의 고통을 껴안으려 했던 작가의 예술혼이 세상을 울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 위주의 사고가 팽배했던 지난 시대 속에서 그녀의 존재는 아폴리네르와 피카소, 마티스, 브라크, 장 콕토의 이름 아래로 묻혀버렸다.
이제 21세기, 그녀의 생애와 예술을 재조명할 때가 다가왔다. 2017년 12월 9일부터 2018년 3월 11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그녀의 한국 최초의 전시회인 '마리로랑생 특별전-색채의 황홀'은 그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사진 = 키스 / 1927년경 / 캔버스에유채 / 81.2X65.1 / Musee Marie Laurencin - 마리 로랑생 30세 무렵, 노르망디에서, 1913년]
심민현 기자 smerge14@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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