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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이승길 기자] "몰라도 돼요. 아들만 넘어지지 않으면 돼요."
소녀 같은 배우, 친구 같은 배우, 엄마 같은 배우, 선생님 같은 배우 바로 김혜자다.
19일 방송된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극본 이남규 김수진 연출 김석윤) 마지막 회에서는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면 누구보다 찬란하고 숭고하게 살아온 김혜자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마지막 회는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라는 아들(안내상)의 독백으로 시작됐다. 어린 시절 당한 교통사고로 인해 의족을 착용하게 된 아들에게 어머니 김혜자(김혜자·한지민)는 늘 엄한 존재였다. 위로 받지 못한 아들은 유난히 긴 사춘기를 보냈고, 어머니와의 사이에도 하나의 벽이 생기고 말았다.
그런 어머니가 현재는 알츠하이머로 인해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김혜자는 뒤섞여 있는 기억을 정리하려 애썼지만, 길고 길었던 인생을 온전히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아들은 어머니의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과거의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특히 이현주(손숙·김가은)에게 "어머니와 관련된 시계를 아는 게 있냐?"는 질문을 건넸다.
그리고 김혜자가 시간을 돌리는 마법의 시계라고 착각하기도 했던 시계의 정체가 드러났다. 김혜자의 젊은 시절, 기자이던 남편 이준하(남주혁)는 결혼기념일에 사라졌다. 정보부에 끌려간 이준하는 백골이 되어 김혜자의 품으로 돌아왔다. 김혜자가 그토록 집착하는 시계는 고문으로 이준하를 죽인 형사가 훔쳐간 남편의 유품이었다.
늦은 밤 김혜자를 찾아온 시계 할아버지(전무송)는 오열하며, 바로 그 시계를 김혜자에게 건넸다. 시계 할아버지는 오래 전 이준하를 죽인 바로 그 형사였고, 김혜자는 오히려 울부짖는 형사의 등을 토닥거렸다.
이준하의 제삿날, 김혜자는 "나의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과 행복했던 기억부터 불행했던 기억까지 그 모든 기억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던 거였습니다. 그 기억이 없어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무섭기만 합니다. 당신이 죽은 날보다, 지금 당신을 잊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무섭습니다"고 고백했다.
며칠 뒤 눈이 내리는 날, 김혜자가 사라졌다.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다녔고, 어렵게 눈을 쓸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김혜자는 다리가 불편한 아들을 위해 평생 이렇게 눈을 쓸어왔다. 아들은 그 사실을 지금껏 몰랐다. 김혜자는 "몰라도 돼요. 아들만 미끄러지지 않으면 돼요"고 얘기했고, 아들은 "평생 내 앞의 눈을 쓸어준 게 엄마였어"라며 오열했다.
또 시간이 흘렀다. 어느 눈이 부신 날, 아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하셨냐?"고 물었다. 김혜자는 답했다. "대단한 날은 아니었어요. 밥을 짓고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우리 아들의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가면 저 멀리서 노을이 지고 있어요. 그리고 남편이 돌아와요. 그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라고.
'눈이 부시게'는 반전의 드라마였다. 시간여행을 다룬 판타지물처럼 출발한 드라마는 어느 순간, 작품이 그려온 것이 알츠하이머 환자의 머릿속 여행임을 드러내 시청자에게 진한 감동과 여운을 안겼다. 반전이 지나간 자리에는 깊은 성찰과 감동이 찾아왔다.
김혜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기한 김혜자의 생애는 너무도 현실적이라 더욱 숭고했다. 그런 김혜자의 생애를 연기한 배우 김혜자는 때로는 사랑을 시작하는 소녀의 눈빛을, 때로는 호기심에 가득한 아이의 눈빛을 표현했다. 현재 시점에서는 혼란스러워하는 알츠하이머 환자이며, 자상한 어른이며, 무엇보다 위대한 어머니를 연기했다.
마지막 회에서 김혜자가 건넨 "몰라도 돼요. 아들만 넘어지지 않으면 돼요"라는 한 마디는 수많은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말 한 마디로, 눈빛 하나로 눈물을 이끌어내는 김혜자는 너무나도 눈이 부신 '대배우'다.
[사진 = JTBC 방송화면 캡처]
이승길 기자 winning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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