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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부산 김나라 기자] "촬영하다 카메라 뒤에서 죽는 게 내 소원" (정일성 촬영감독·90)
6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우동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관에선 '마스터클래스: 나의 인생, 나의 영화 정일성 촬영감독' 행사가 진행됐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2019 BIFF) 한국영화 회고전 주인공이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한국영화의 역사를 일궈온 장인이자 자신만의 독특한 촬영 세계를 구축한 촬영의 대가이다.
그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조긍하 감독의 '가거라 슬픔이여'(1957)를 통해 촬영감독으로 입문했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에서는 그만의 파격적인 앵글과 색채 미학을 선보이며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구축했으며,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에서는 사계절을 담기 위해 1년 이상 촬영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신궁'(1979)으로 임권택 감독과 처음 조우한 그는 '만다라'(1981)로 정일성 미학의 정점을 찍게 된다. 당시 한국영화에선 만나기 힘든 미장센과 시퀀스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한 첫 한국영화라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이후 '서편제'(1993), '취화선'(2002) 등 임권택 감독 대부분의 작품에서 카메라를 잡으며 오랫동안 명콤비로 활약했다.
이처럼 정일성 촬영감독은 한국영화를 대변해 온 동시대의 대표 감독들과 수없이 많은 작업을 해오며 한국영화의 촬영 미학을 이끄는 선구자 역할을 해왔다.
이날 정일성 촬영감독은 "자연인 정일성의 인생에 있어 큰 굴곡이라고 하는 건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침량 당하고 다시 조국을 찾았다는 것"이라며 "이데올로기가 초토화되어 있을 때 살아있었고 6·25를 겪은 것 또한 자연인 정일성의 굴국 중 하나였다. 촬영감독 정일성으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면, 두 번의 큰 수술이 있었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어 50년 영화 인생의 철학을 밝혔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멜로, 사극, 오락영화 등 어떤 장르의 작품이든 찍을 때 개인적인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영화는 미학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라며 "일하는 과정에 있어선 꼭 세 가지를 지키려 했다. 형식의 중요성, 영화적 리얼리즘, 그다음은 모더니즘이었다. 이 셋을 끌어가는 건 '격조'였다. 인간에게도 격조가 있듯이 예술에도 격조가 있어야 한다는 게 어릴 적부터 가진 신념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138편을 찍었는데 다 실패작이다"라고 표현해 눈길을 끌었다. "반대로 말하면 다 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부끄러운 영화를 촬영했지만 이 모든 게 내 대표작이고 나의 스승이다"라고 전했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제가 촬영한 작품이 아름답다고 하시는데, 저는 아름답게 찍으려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라며 "다만 이 땅에 자라나서 조국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담고자 노력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찍지 않을까 싶다. 한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럽다"라고 얘기했다.
"영화가 곧 종교"라는 정일성 촬영감독. 그는 "내겐 종교가 없다. 그런데 혹 누군가가 종교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스스럼없이 '나에게 종교란 영화다'라고 답할 거다"라며 "영화인이 어떤 종교를 갖게 되면 편애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하더라. 세계에 그렇게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후배 영화인들을 향해 애정 섞인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지금 일을 안 하고 있지만, 젊은 감독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내가 실패한 것, 시행착오를 얘기해주고 싶다. 나는 깨닫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니 '너희는 잘못된 영화를 하지 말라'라고, 그 시간을 단축시켜주고 싶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요즘 한국 영화계가 좋은 환경이지 않나. 그렇다면 굉장히 열악했던 우리 시절보다 몇 배 나은 영화가 나와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안 나오고 있다"라며 "우리 세대가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면 젊은이들은 풍요로움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영화의 매력이라는 게 생략, 비약, 상상력인데 매너리즘에 빠지면 상상력이 없어지고 그저 안일하게 되어버린다"라고 지적했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좀 실패하더라도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시도를 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요즘은 한국영화가 아니고, 미국영화를 흉내만 내려는 작품이 너무 많다. 가슴 아프다. 젊은이들이 독창성을 찾고, 지금 이 땅에서 태어나 한국인 정체성을 담은 영화를 제작했으면 하다. 내가 찍은 영상을 통해 또 다른 자아를 발견했듯이, 여러분도 미래를 향해 나아갔으면 한다. 가려진 부분을 찾아내는 건 여러분의 몫이다"라고 전했다.
특히 정일성 촬영감독은 "죽을 때까지 치매가 안 왔으면 좋겠다. 치매가 온다면 이렇게 과거 영화 역사를 설명할 수도 없고, 이렇게 변명할 수도 없지 않나"라며 "그저 촬영하다가 카메라 뒤에서 죽고 싶다. 아파서, 혹은 지나가다 교통사고를 당해 객사로 죽는 게 아니라 카메라를 붙들고 쓰러지고 싶다. 그게 소원이다"라고 밝혀 뭉클한 감동을 자아냈다.
[사진 = 부산 송일섭 기자 andlyu@mydaily.co.kr]
김나라 기자 kimcountry@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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