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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정지현 기자] '불행을 사는 여자'가 행복을 좇는 인간의 잔혹한 본능을 짚으며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종합편성채널 JTBC 드라마페스타 '불행을 사는 여자'(극본 이효원 연출 김예지)가 지난 2일 타인의 존재를 통해서야만 스스로의 행복을 입증할 수 있는, 본능의 기묘한 셈법에 갇힌 차선주(왕빛나)와 정수연(백은혜)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호평을 불러일으켰다.
무너지는 두 여자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 행복의 비밀은 마지막까지 서늘한 공감을 안겼다. 행복을 향한 날 것 그대로의 본능으로 부딪치는 두 여자의 충돌을 그려낸 왕빛나, 정수연의 시너지도 더할 나위 없었다. 왕빛나는 평생을 거짓된 삶으로 살아온 차선주의 두 얼굴을 완벽하게 그려내며 색다른 변신에 성공했다. 백은혜 역시 베일에 감춰져 있던 속내를 서서히 드러내는 정수연의 감정선을 탁월한 완급 조절로 풀어내며 힘을 실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음에도 애써 외면하는 잔혹한 갈망. '불행을 사는 여자'는 이 비밀스러운 감정을 속도감 있는 전개와 매력적인 인물을 통해 짚어내며 단막극의 진수를 선보였다.
이날 방송은 능력 있는 소설가, 친절한 이웃, 다정한 아내로서 완벽한 삶을 꾸려나가는 차선주의 모습으로 시작했다. 그가 맡은 역할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정수연의 좋은 언니. 이상하리만치 불행한 일이 쏟아지는 삶을 살아온 정수연과는 동아리 신입생과 선배로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남편 이우현(최승윤)의 바람으로 정수연의 결혼 생활이 파국을 맞은 순간에도 둘은 함께였다. 정수연은 전화를 받고 찾아온 차선주에게 "나 당분간 언니 집에서 지내면 안 돼?"라고 부탁했고, 차선주는 그의 공허한 얼굴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함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정수연은 문득 자신을 '불행하게 사는 여자', 차선주를 '불행을 사는 여자'라고 칭하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냈다. 좋은 뜻이냐며 묻는 차선주의 말에 그는 "그럼, 내 불행이 누군가에게 가치 있다는 건데"라고 답하며 또 한 번 미묘한 기류를 자아낸 정수연. 그런 그가 찝찝하다는 남편 김태준(김재철)의 불평까지도 뒤로 한 채 정수연과의 동거를 시작한 차선주였지만, 이상 징후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포착됐다. 자신을 연재 잡지에서 잘라낸 편집장이 정수연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 이에 차선주는 "수연이 지금 일하기 힘든 상태예요"라며 변명처럼 그의 말을 쳐냈다.
1층 안내데스크 직원과 바람난 남편 때문에 이혼 위기를 겪고 있는 불행한 정수연이기에, 차선주는 닥쳐오는 불안감 속에서도 그를 내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는 정수연과 김태준이 한 침대에 누운 기막힌 광경과 마주했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차선주에게 정수연은 "형부는 언니가 누워있는 줄 착각하셨나봐"라며 태연히 대꾸했다. 여기에 김태준의 불륜 흔적이 우편물에 담겨 배달되면서 차선주의 내면에는 더욱 큰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거듭 모른 척 하려고 해도 불행은 멈추지 않았다. 차선주가 빠진 연재 자리를 정수연이 꿰차게 된 것. 정수연은 미안하다고 사과를 전하는 한편, "언니가 편집장님한테 그랬다며. 나 지금 일할 상황 아니라고. 설마 내 앞길 막으려는 꿍꿍이로 그랬겠어?"라며 그의 행동을 짚었다. 이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차선주의 모습은 마침내 그의 가면이 벗겨지고 있음을 암시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빠르게 반전됐다. 차선주를 '까내고' 연재처를 차지했던 것처럼, 그의 옷을 입고 '문학인의 밤'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정수연. 여전히 진짜 속내는 감춘 채 미소로 그를 축하해주던 차선주는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잠깐 정신을 차린 사이, 그는 남편이 곁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닫힌 정수연의 방문 너머에서 또 다른 불안, 혹은 불행의 기운을 감지하고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그는 문을 여는 것이 아닌, 등을 돌리는 쪽을 선택했다. 차선주는 이미 산산조각 나기 시작한 완벽한 삶을 외면하고 있었다.
정수연은 바로 그때 차선주를 떠났다. 이우현과 따로 만나고 온 뒤, 정수연은 그를 용서했다며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차선주는 강박적인 모습을 보이며 "너 정말 다 잊을 수 있어? 평생 생각날 거야"라고 말렸지만 정수연은 그런 그를 비웃듯 "언니 결혼 생활은 한 점의 티끌도 없어?"라고 의미심장하게 되물었다. 이어 "고마웠어, 그동안. 다 언니 덕분이야"라며 차선주를 무력하게 만드는 주문 같은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난 정수연. 차선주는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불행의 자국만을 하염없이 닦아내고 또 닦아낼 뿐이었다.
마치 그의 집에 모든 불행을 내려놓은 듯, 정수연은 등단 인터뷰까지 하며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동료 오경화(이봉련)은 부러움과 시기가 뒤섞인 말들로 이죽였다. "나보다 불행했던 사람이 행복해지는 게 배아픈 법이야"라는 그의 말은 적나라했지만, 차선주로서는 단 한 번도 인정해본 적 없는 진심이었다. "자긴 그런 생각으로 사람 대해?"라며 짐짓 놀란 척 물은 차선주. 그러나 정수연의 등단작 제목이 '불행을 사는 여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결국 차선주의 연기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먹듯, 불행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자신의 행복에 감사하는"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은 차선주 그 자체였다. 정수연의 입을 타고 흘러나오는 이야기 속에서 아무도 몰래,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던 자신의 민낯이 낱낱이 까발려지자 차선주는 모멸감에 휩싸였다.
숨겨져 있던 진실도 밝혀졌다. 정수연과 이우현의 불화에 단초를 놓은 이가 다름 아닌 차선주였던 것. 그토록 축하해 마지 않던 정수연의 결혼식날, 또 한 번 선의를 방패 삼아 이우현에게 정수현의 낙태 사실을 알렸던 차선주. "다시 불행해진 후배를 보며 여자는 생각합니다. 다행이다. 어둡고 축축했던 내 삶에 그녀가 없었더라면 나는 얼마나 더 불행했을까"라며 주인공의 독백을 가장해 차선주의 속내를 읽어내는 정수연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가웠다. 이윽고 기묘한 행동이 이어졌다. 환한 미소로 차선주에게 다가간 정수연은 힘들 때마다 위로해준 그에게 작은 보답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차선주가 그랬듯, 모두의 앞에 임신을 향한 차선주의 간절한 바람을 전시하며 '응원의 박수'를 보내달라고 했다. 산발적으로 터지는 동정 속 '불행한 여자'가 된 차선주는 황급히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를 따라간 정수연은 "행복하게 사는 것도 요령이니까"라며 또 한 번 몰아세웠다. 이어 "여자가 임신을 못하는 진짜 이유 알려줄까?"라며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모습은 극적인 미스터리를 배가시켰다. 하지만 자각도, 충격도 잠시뿐이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차선주의 모습은 그가 여전히 '불행을 사는 여자'임을 보여주며 마지막까지 서늘한 충격을 안겼다.
'불행을 사는 여자'는 자신의 행복 만큼이나 타인의 불행을 바라는 인간의 본능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더욱 깊이 있는 메시지를 남겼다. "힘들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글이 깊어지는 거"라던 차선주의 표상적인 위로는 결국 정수연을 오랜 세월 불행에 잠식되도록 만들었다. 정작 그 불행의 값어치를 계산하는 이는 자신이었음에도, 이를 부정하며 선의라 말하는 차선주의 모습은 행복을 향한 조용하고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과 닮아 있었다. 밀도 높은 대본을 담아낸 감각적인 연출도 힘을 더했다. 특히 지금껏 시청자들이 따라가던 차선주의 일인칭 시점이 깨지고, 타인의 불행에 누구보다도 즐거워하던 그의 이면이 드러난 순간은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여기에 응축된 대사로 이루어진 두 여자의 '구강 액션'과 행복을 찾아 헤매는 이들의 조용한 몸부림을 섬세하게 그려낸 왕빛나, 백은혜의 연기는 설득력을 더하며 차원이 다른 '심리 서스펜스'극을 완성했다.
[사진 = JTBC 방송 화면]
정지현 기자 windfall@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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