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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YTN 방송화면 캡처
[마이데일리 = 김성호 기자]“평온하던 마을이 고성과 욕설이 난무하는 현장이 됐다. 더는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 비서실이 지난달 30일 낸 입장문이다. 대통령직 퇴임 후 경남 양산 평산마을 사저 인근에서 이어진 시위의 심각성을 경고한 내용이다. 다음날인 31일, 평산마을 사저 일대는 예상과 달리 조용했다. 연일 소란을 피우던 시위대도 보이지 않았다. 문 전 대통령의 ‘한마디’에 경찰이 곧바로 제지에 들어간 것이다. 이후 평산마을엔 3~4개 단체 40~50여 명의 ‘조용한’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경제에 따르면 이런 상황을 전해 들은 한 직장인은 “전직 대통령은 말 한마디로 시위를 멈출 수 있는데, 기업들은 10년 넘게 당하고 있다”며 “그걸 그대로 수수방관한 문 전 대통령이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3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앞. 노동가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정문 앞 도로는 ‘악질 장사꾼 삼성 이재용’이란 플래카드가 붙은 빨간색 버스가 점령하고 있었다. 과거 삼성중공업 협력업체 대표였다는 김모씨는 2001년부터 21년째 시위를 이어오고 있다. 그 옆에는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퇴직자들이 천막에 분향소까지 차렸다. 하루 평균 4~5개 단체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삼성 계열사 한 직원은 “사실 체념한 상태인데, 오늘은 그나마 노래만 틀어놔서 좀 나은 편”이라며 “확성기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몸살을 앓는 곳은 삼성전자만이 아니다.
현대자동차 LG 효성 등 여러 기업이 밤낮을 가리지 않는 ‘극한 소음 시위’에 수년째 시달리고 있다. 소송을 제기하고, 경찰에 신고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 경찰도 폭력이나 방화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면 뒷짐만 지고 있다.
기업 총수 자택도 예외가 아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집 앞에는 54일째 삼성전자 노조의 임금 인상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노조나 시민단체는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룹 총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문 전 대통령 사저 인근에 모이던 시위대를 잠재운 것은 ‘강경’도 ‘미온’도 아닌 ‘법대로 조치’다. 비서실은 “피해 당사자로서 엄중하게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방침”이라고 했다.
급기야 3일 경남 양산경찰서는 사저 앞에서 내달 1일까지 집회를 열겠다고 신고한 단체에 처음으로 집회 금지를 통고했다. 소음 기준(65데시벨)을 어겼다는 이유에서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뒤늦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 추진에 나섰다.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한 뒤 2017년 사저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을 때는 오히려 참여를 독려한 당이 민주당이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문 전 대통령도 직접 당해 보니 심각성을 느낀 것 같다”며 “이제라도 정부와 국회가 불법 시위 대응책 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기업 본사 주변은 정말 ‘헬(지옥)’입니다. 대헬요.”
직장인 이모씨(40)는 매일 오전 7시면 창문을 뚫고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다. 이씨가 사는 곳은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300m 떨어진 오피스텔. 여러 시위대가 몰려들어 소음이 뒤엉킬 때면 정말 고통스럽다.
주요 대기업 인근에선 이런 일이 수시로 벌어진다. 이씨는 “경찰에 신고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며 “앞으로 절대 대기업 본사 근처에는 집을 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주요 대기업 본사 앞 ‘소음 시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기업 본사 앞 소음도는 수시로 80dB을 넘는다. 100dB 가까이 올라가는 날도 있다. 80dB은 지하철이 지나가는 수준의 소음이고, 100dB은 헬리콥터 바로 옆에 있는 수준의 소음이다.
지난주 평일 5일간 삼성전자 서초사옥 정문 앞 소음을 측정한 결과 최저 66dB, 최고론 88dB까지 치솟았다. 시위대가 틀어 놓은 노동가, 장송곡 등이 울려 퍼질 때마다 소음 측정기 숫자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삼성전자 사옥과 맞닿아 있는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인근도 상황은 비슷했다. 확성기 소리가 커질 때면 80dB은 기본이었다. 가장 소음이 심각할 때는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1시30분 사이. 점심시간대 직장인 이동이 많을 때를 겨냥해 시위 강도를 높인 탓이다.
삼성전자 한 직원은 “얼마 전 임신한 직장 동료는 오전 11시 반이면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장송곡 소리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예정보다 일찍 출산 휴가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르면 주거지역, 학교, 종합병원 인근은 최고 소음도가 주간(오전 7시부터 해지기 전)에는 85dB, 야간(해진 뒤부터 0시 전)엔 80dB, 심야(0시부터 오전 7시)에는 75dB을 넘으면 안 된다.
대기업 관계자는 “시위대는 대부분 이 같은 기준을 아슬하게 피해가며 ‘소음 공해’를 일으킨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반 포기’ 상태다.
경찰은 폭력, 방화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면 개입하지 않는다. 집회·시위의 자유는 헌법에 명기된 국민의 권리라는 이유에서다.
이미 시시비비가 가려진 사안이거나 이해당사자가 아닌 경우에도 시위부터 하고 보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임금 인상, 퇴직자 복직, 보험비 추가 지급 등을 요구하는 일도 많다.
스피커와 확성기로 오너 기업인의 이름을 부르며 고함을 치곤 한다.
‘OOO! 개XX’ 같은 욕설을 내뱉는 사례도 흔하다. 사내 어린이집까지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자녀들이 공포를 호소해 등원시키지 않는 직장인도 있다.
이 같은 소음 시위는 직원들뿐 아니라 인근 거주자, 주변 상인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 서울 청담동 하이트진로 본사 인근 주민은 소음 시위를 중단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여러 차례 강남구 등에 제출하기도 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집회와 시위는 헌법상 국민의 권리지만, 다른 가치와 상충할 만큼 과도하면 제대로 제재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은 집회·시위 관련 규제 강도가 매우 약하다”고 했다. 특히 집회·시위 소음 관련 규제 수준은 다른 국가에 비해 크게 낮다고 최 교수는 지적했다. 미국 주거지역 내 소음은 낮엔 60dB, 야간에는 55dB 이하를 지켜야 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전직 대통령이든 기업인이든 상관없이 모든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불법 집회·시위에 대해 엄격하게 법을 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시위 피해와 관련,페이스북을 통해 “국회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약하지 않되, 주민 피해를 최소화할 입법을 강구하라”고 촉구했다.
지난 3일 경남 양산경찰서는 코로나백신피해자가족협의회가 집회를 신고한 13곳 중 문 전 대통령 사저 앞과 평산마을회관 앞에 대해 집회 금지를 통고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문재인 정부 이후 집회 만능주의가 확산했다”며 “무슨 일이든 시위로 해결하려는 관행이 깨질 수 있도록 불법 집회·시위를 엄단할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김성호 기자 shkim@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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