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영화는 대기업 통신사 콜센터에서 일하던 특성화고 3학년 현장실습생의 실제 자살 사건을 근거로 재구성했다. 아이돌 춤을 좋아하고 배우던 꿈많은 여고생 소희가 한겨울 저수지에 빠져 꽁꽁 얼어붙은 채 발견된다. 식어버린 소녀의 육신처럼, 차갑고 무미건조한 얼굴로 나타난 형사 유진이 대수롭지 않은 자살 사건처리를 맡게 된다. 유진은 점점 무언가에 이끌리듯 사건을 파헤치며 소희가 저수지까지 걸어 들어가기까지 행적을 밟아간다.
소희가 죽음으로 내몰린 순간에 맥주 두 병을 시켜 마시고 나갔다는 가게 주인의 증언을 듣는다. 유진도 소희가 앉았던 가게의 그 자리에 앉는다.
“소희가 시킨 거, 그대로 주세요.”
소희와 유진이 결코 만날 수 없는, 각기 다른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만난다. 맥주의 쓴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마셨을 그 자리에,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이 발등에 닿는 걸 가만히 바라본다. 목전까지 다다른 죽음 앞에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때, 한 줄기 빛이 발목을 잡으며 소녀의 마지막 선택을 말리는 것으로 보였다. 절망 속에서도 한 가닥 잡고 싶었을 생이었을 텐데, 해가 기울자 그 빛마저 야속하게 사라졌고 그즈음 소희가 저수지로 향했을 것이다.
소희는 학교의 추천으로 대기업 취업에 고객 상담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통신사 고객의 해지를 막는 ‘해지 방어’업무를 하게 된다. 실상은 고객들의 온갖 폭언과 희롱에 시달리며 해지요청 고객들의 탈퇴를 필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일로 사회초년생이자 실습생이 감당하기엔 처참하게 정신이 마모되는 일이다. 책임자가 실시간으로 상담직원들을 일일이 감시하며 압박하는 장면은, 마치 전장에서 죽을 위기에서도 후퇴하지 못하게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전투상황 같았다. 매일 반복되는 질식할 자괴감과 성과하락으로 회사의 압박에 눌려 그만두려 하지만 학교에서는 취업률 달성을 위해 버티라고 강요한다. 벼랑 끝에 몰린 소희는 차라리 악바리가 되기로 다짐한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해지를 거듭 부탁하는 고객에게도 무심하게 계약연장 응대 멘트를 기계처럼 반복하며 뱉어낸다. 고객의 편도 소희의 편도 되지 못하는 암담하고 비참한 장면이다.
소희는 가까스로 버티며 돈이라도 벌겠다는 안간힘으로 1등이라는 성과에 도달하지만, 동료들에겐 더 높은 목표율을 강요하는 눈엣가시가 된다. 그런 데다가,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임금마저 제대로 받지 못한다. 열아홉 살 소녀의 몸에 지닌 모든 울분과 절규로 부도덕한 회사에 맞서 보지만 불가항력의 무소불위다. 본사와 센터, 팀장, 학교, 교육청, 교육부까지 무한경쟁을 강요하고 연대책임의 두려움과 경쟁의 카르텔에서 가장 밑바닥에 깔린 이들이 소희와 같은 현장실습생이다. 그들의 목이 졸린 가쁜 호흡과 청춘을 묻어버리는 절망의 숨소리가 관객의 깊은 한숨으로 옮았을 것이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루에도 몇 번씩 듣게 되는 인사말이다. 내 귓전을 스쳐 간 얼굴 모르는 수많은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그중에 소희 같은 꿈많은 젊은 영혼들이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때로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을 내가 미안해진다. 진심으로 고객을 사랑할 수 없는 그들에겐 ‘무섭습니다, 고객님’이라고 대변할 속마음이고, 살벌한 이윤 지상주의 권력과 횡포에 몰린 간절한 호소였을 생각을 하니 처연해진다.
응축된 울분을 담담한 시선으로 따라가는 감독의 의지와 가치관이 영화적 언어로만 남기엔 아쉬운, 묵직한 책임감과 이 시대의 어른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한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통감하며 영화에서나마 시원한 복수를 했으면 싶었지만, 영화에서도 통쾌한 복수는 없다. 소희의 안타까운 상황 앞에서도 안일한 대답을 하는 그에게 주먹을 날리는 유진의 한 방에 복수의 영혼을 갈아 넣은 듯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소희를 위해서 대상 없는 복수의 칼날 대신 진실의 용기를 장착하고 단호한 사회적 책임과 행동으로 무장해야 하지 않을까.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전문위원 겸 수필가.
*이 글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진=다음 소희 제작사 제공]
이석희 기자 goodluck@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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