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연예
오래 전 이태원의 한 식당에서 옆 자리에서 밥을 먹고 있던 강호동을 본 적이 있다. 씨름판을 떠나서 예능 프로그램의 코미디언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만큼 예능계에서 입지를 굳히지는 못했던 아슬아슬한 시기였을 테다.
그 당시 지방 동네에서 쓰는 정제되지 않은 사투리 억양을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고주파 음질에 실어서 지상파 방송에다 쏟아내는 그의 행태에 대해서는, 요즘과 비교할 때 호불호의 비율이 확실히 달랐을 때다. 아마도 강호동은 '진솔하게 땀을 쏟는 스포츠의 세계를 등지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천박한(?) 연예계로 운신의 좌표를 옮겼다'는 수군거림을 이곳 저곳에서 들었을 것이다.
그 날 자신을 반갑게 대하지도 않고 아는 척도 해 주지 않는 주변의 힐끔거리는 시선을 커다란 등판으로 막으며 비슷한 체구의 동료와 그저 밥만 먹고 일어서 나간 바로 옆 테이블로부터 내가 들었던 말은 딱 한마디였다.
TV에서 들었던 높은 고음이 아닌, 저음으로 쫙 깐 음성으로 “아줌마! 밥 한 그륵 더 주이소.”
공기 밥을 한 그릇 더 날라다 준 식당 아주머니조차 “여기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 둘이 30분이 좀 넘는 시간 동안 낸 소리는 그 말 한마디와 음식 씹어 넘기는 소리가 다였던 게다.
그냥 지나치고 잊어버려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그 날 일이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특별한 느낌으로 남아있는 것은 왜일까?
경상도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20년 정도를 경남의 부산 바닥에서 보낸 내가 그 날 식당에서 본 것은 모래판을 떠나 겉으로 보기에는 윤기가 흐르지만 확실한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이전투구로 치자면 운동 판보다 훨씬 더 치열한 장에 이제 막 던진 자신의 커다란 몸 속에 한 끼 밥을 밀어 넣고 있던 전형적인 경상도 사내였다.
경상도 남자들이 가까운 가족과 긴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 새로울 것도 없는 식상한 얘기지만 그 속내에는 경상도 출신 사람들이 아니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부산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로 ‘시사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런 저런 말을 쓰잘떼기 없이 늘어 놓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니까 서울 말로 ‘푼수’와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부산에서 남자가 시사이라는 용어를 쓰는 일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 등 남자 가족들끼리는 쓸데 없는 말은 고사하고 뜻이 담긴 말조차 별로 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사이라는 말을 쓸 일도 없고 들을 일도 없다. 기껏해야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생전 진지한 충고나 친근한 농담 한번 해 주지 않던 형이라는 자가 동생의 친구들에게 몇 마디 던질 때 3인칭으로 부르는 ‘일마 이거’라는 호칭을 들을 뿐이다.
그토록 말 많은 것을 금기 시 하는 경상도 남자들은 정말 죄다 말이 없는 내성적이고 과묵한 인간들일까?
이게 바로 오해다. 경상도의 아이들은 대부분 어느 순간 과묵한 자기네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를 산산이 부숴버리는 충격적인 체험을 겪는데 그것이 가족간 야유회 같은 행사이다.
날씨 좋은 날 엄마 아버지를 따라 간 그 곳에서 아이들은 집에서는 한마디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고 엄마라는 메신저를 통해서만 전달 사항을 전해 들었던 아버지의 숨겨졌던 음성이 불꽃의 향연처럼 펼쳐지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전까지 우리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 동안 자신의 커뮤니티로 관계 맺어온 외부 사람들 사이를 종횡으로 누비면서 온갖 간섭을 해 대고 썰렁하기 짝이 없는 어른 식 농담을 연신 쏟아내는가 하면 다른 가족들의 자녀들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아따 잘 생??네” “공부 잘 하나?”를 남발하는 아버지는 알고 봤더니 시사이였던 거다.
그런 이색적인 체험은 경상도 남자 아이들이 그 전까지 가졌던 막연한 반성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계기가 된다.
과묵한 아버지나 말없고 무서운 형에 비해 자신은 말이 많은 편이라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며 시사이 마냥 가볍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친구들과 잡다한 수다를 떠는 것이나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여학생들을 희롱하는 것을 행여 남자 가족에게 들킬 일이 있어도 그다지 창피스러울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학교 선생님이나 다른 어른들 보다 훨씬 더 무겁고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예의주시하며 자신의 품행을 평가하고 있기에 언제나 어렵게만 느껴졌던 아버지도 알고 봤더니 집 밖에서는 시사이였으니까.
비록 그 후로도 가족끼리 있는 공간에서 지켜오던 서로간의 과묵함과 가끔 씩의 중 저음 대화 원칙은 계속 이어지지만 딴 데 가면 아버지는 아버지의 바깥 세계에서 개그맨이고 형은 형의 세계에서 수다쟁이라는 사실이 공감으로 자리하면서 대화 없는 관계의 끈에 전과 다른 무언의 신뢰나 규율 같은 것이 더해진다.
그런데 강호동이 경상도 남자의 그 시사이 짓을 전국 TV 화면으로 가지고 나와 버린 것이다.
"밥 무라”같이 두 단어 정도의 조합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말만 낮게 깐 음성으로 가끔 던지면서 사는 경상도 남자의 공인된 이미지가 허구였음을 공중파에서 폭로하면서 그 색다른 콘텐트를 연예계에 제공한 셈이다.
아마도 강호동이 오락 프로그램에 모습을 드러내던 시절 경상도 아버지들은 저녁 무렵 가족들과 함께 TV를 시청하면서 웃지도 않고 그냥 밥 만 드셨을 거다. 아니면 보이지 않을 만큼의 쓴 웃음만 지으셨거나.
어쨌든 경상도 사내 판도라 상자를 연 강호동의 연예계 진출 프로젝트는 반짝 성공을 거두었고 그 무렵이 그 무렵이 내가 그를 식당에서 보았을 때다.
그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화면 속 코미디언 강호동과 식당에서 말없이 밥만 먹는 강호동 사이에 놓인 벽은 예능과 현실을 가로막은 경계처럼 보였다.
경상도 남자 사투리의 개그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애교로 관심은 일단 잔뜩 끌었지만 문제는 그 관심의 거품이 꺼지는 때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올 수도 있다는 연예계의 속성과 대중의 기호를 그가 과연 알아채고 있었을까?
밥을 먹으면서 동료와 나누는 대화를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고 커다란 등도 움직임이 없었다.
그 침묵이 흐르는 광경은 예전 부산에서 살았던 내가 친구 집에서 보았던 아버지와 가족들이 함께 밥상에 모여 앉아 있던 모습과 교차되었고 TV에서 방방 뜨던 모습이 싹 지워진 강호동의 뒷모습에서 나는 집에서는 오로지 자신에게 짐 지워진 밥벌이와 미래 설계의 부담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무언의 권위를 세우던 경상도 아버지의 반쪽 모습을 보았다.
아마 그 날 식당에 함께 있던 동료도 어쩌면 동생이나 혹은 다른 가족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세월이 꽤 흘렀다. 이제 그는 방송에서 단지 애교나 어리광만 부리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유행처럼 한번씩 써 먹는 버럭 소리지르거나 하는 아이템을 달고 가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만능이라는 별칭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강호동의 예능 상품은 모르긴 해도 당초 예상보다 더 긴 수명을 얻어 명실상부한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요즘 잘 나가는 강호동을 보면 그가 경상도 사내의 시사이 짓에 더해 다른 한 면까지 절묘하게 잘 버무려 내고 있는 듯 하다.
'1박2일'에서 팀원들과 희희낙락을 하는 중에 슬쩍 보여주는 다른 표정이나 보는 이가 결코 부담 느끼지 않을 만큼만 연기하는 매섭고 진중한 눈빛 그리고 쨍쨍거리는 높은 음색에 섞어서 내는 콘트라베이스의 음역 같은 저음의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그를 보면 마치 성격이 다른 몇 명이 동시에 펼치는 파노라마를 보는 것 같다.
마치 경상도 남자의 집 안 모습과 바깥 세계에서의 시사이 짓이 황금비율에 맞게 조화되어 같은 시공간에서 거리낌 없이 진솔하게 정체를 드러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걸 보는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때론 몇 초간 감동 받기도 한다.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을 한꺼번에 오락 프로그램에서 한 사내의 몸짓을 통해 보는 경상도 사내들도 자신들의 이중성을 상품으로 써먹은 그를 시사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방송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말에 진정성이 있고 없고를 굳이 따지는 것에 쏟는 관심은 대중들 사이에서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 정도로 그는 영리할 테니까.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한번 잘 해 보길. 실제로 집에서는 또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 두 가지 모습을 함께 보여주면서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지 아니면 여느 옛 시절 통념 속에 사라져 간 경상도 남자의 반쪽 모습만 보여 주면서 경상도식 가족을 꾸리고 있는 지 그건 알 바 아니다.
그러나 행여 아침 프로나 인터뷰 같은 데서 그런 류의 질문이 나와도 당신만큼은 가정사를 시시콜콜 방송에다 풀어 놓는 그 놈의 시사이 짓은 하지 말기를.
[사진 = 김재훈 작가 그림 강호동(위), 김재훈 작가(아래)]
문태경 기자 mtk@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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