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종합
[마이데일리]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24일 야권 무소속 박원순 후보 캠프를 방문하면서 언급한 미국 여성운동가 로자 파크스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안 원장이 언급한 로저 파크스는 1913년 2월 4일 알리바마 주의 흑인가정에서 태어났다. 1955년 12월 1일 그녀는 버스에서 한 백인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거절했으며 이 사건은 미국 현대 민권 운동의 서막을 여는 계기가 됐다.
그 당시 알리바마 주에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법률이 집행되고 있었는데 규정에 따르면 흑인은 버스, 음식점 등의 공공장소에서 백인과 함께 앉아서는 안 된다. 사건 당일 버스 안에 사람이 매우 많아 버스기사는 로저 파크스에게 자리를 백인남자에게 양보하도록 요구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미국 역사를 바꾸는 흑인 민권 운동이 촉발됐다.
당시 파크스는 42세의 재봉사였으며, NAACP(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지부 회원이었다. 흑인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하여, 그녀는 구속되었으며 14달러의 벌금형을 받았다.
그녀의 체포를 계기로 킹 목사가 이끄는 버스승차거부운동이 일어났다. 공공운송수단의 인종차별은 위헌이라는 1956년의 대법원 판결을 끌어냈으며, 1964년 공공시설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연방시민권법의 결실을 맺었다.
파크스는 “체포되었을 당시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고 30년이 흐른 뒤 말했다.
자리 양보를 거절한 것이 파크스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해 초, 몽고메리의 두 흑인 여성이 같은 이유로 체포되어 벌금을 물었다. 그러나 파크스는 감옥에 갇혔으며 NAACP의 지원을 받아 전체 흑인들의 승차거부운동이 일어났다.
수천 명의 흑인들이 직장이나 학교로 걸어갔으며, 흑인이 모는 택시만을 탔다.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은 거부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Montgomery Improvement Association을 결성했고,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의 전도양양한 26살의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승차거부운동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하였다.
결국 381일 동안 4만2천 명의 흑인들이 도시의 공공운송수단 승차를 거부했다. 몽고메리 카운티는 카풀을 막는 법과 택시 요금 인상으로 보이콧을 중지시키려 했고, 킹 목사의 집에는 폭탄이 떨어졌다.
결국 미 연방 대법원은 파크스의 벌금형을 무효화하고 몽고메리 버스의 인종차별을 없애라고 명령했다. 1956년 킹 목사와 다른 지도자들은 백인과 나란히 시내버스에 최초로 올라탔다. “우리는 보이콧이 나흘이나 갈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고작 인종차별의 완화를 원했다. 그러나 흑인들은 폐지를 원했다.”며 당시 보이콧의 지도자였던 랄프 아베르나시 목사는 말했다.
로자 루이즈 맥컬리(결혼 전 이름)는 1913년 2월 4일 앨라배마의 터스키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조부모는 노예 출신이었다.
11세에 그녀는 미 북부 여성들이 세운 몽고메리 산업여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우리 흑인에겐 시민권이 없었다. 이는 생존의 문제였다”고 그녀는 말했다. 부모와 조부모는 그녀에게 조금씩 평등 사상을 주입시켰다.
앨라배마 주립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은 뒤 그녀는 재봉사가 됐다. 1932년 이발사 레이몬드 파크스와 결혼했으며, 둘은 흑인의 투표권 획득에 공감하고 NAACP에 가입하여 비서로 일했다.
1957년 파크스와 남편은 디트로이트로 이사해, 미 공화당원 존 콘이어스의 보좌로 일했다. 1977년 레이몬드 파크스는 사망했는데, 부부에게 아이가 없었다. 1999년, 86세의 파크스는 의회로부터 가장 고귀한 시민에게 주는 명예의 금메달을 받았다. 이후 로자 파크스는 2005년 사망했다.
[로자 파크스의 ‘My Story’, 사진 = 대교 리브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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