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신일본제철에는 강제징용자들의 피와 땀이 배여 있습니다"
신일본제철 강제연행 피해자인 여운택(89)옹과 일본 시민단체 '일본제철 전 징용공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회원들이 24일아침, 도쿄 치요다구에 위치한 신일본제철 본사를 찾았다.
8시 30분부터 이뤄진 이들 모임의 시작은 신일본제철 본사 앞에서의 항의 활동이었다. 여운택 옹은 시민단체 회원들과 함께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 전단지를 지나는 행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다소 서툴긴 했지만 직접 일본어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억울함과 신일본제철의 부도덕함을 알렸다. 비록 마이크가 아닌 확성기를 통해 말하는 것이었지만, 여옹의 목소리에는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비장함이 배어 있었다.
약 9시 30분경, 일행은 신일철 본사에 들어갔다. 사장이나 회사 책임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회사 로비에 있는 안내데스크에 가서 사장 면담신청을 하자 기다렸다는듯이 '만날 수 없다'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회사 방침상 누구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회사 책임자 면담을 요구했지만 안내원은 '절대불가'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얼마 후엔 경비 책임자가 나왔지만, 그들 또한 답변은 똑같았다.
"89세 노인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신일본제철의 강제징용 피해자입니다.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
여운택 옹과 일본시민단체 관계자는 구태여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올해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로 일본 시민단체 일행이 신일본제철 본사를 방문한 것이 이번이 두번째.
지난 7월 20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당 김영진 의원이 한국 국회의원 61명의 서명을 받아 신일본제철 본사를 방문, 사장과의 면담을 요청했었다. 이때는 신일본제철 측에 미리 연락도 했었다. 하지만 한나라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그것도 61명의 현역의원 서명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사장은 끝내 얼굴한번 내비치지 않았다. 대신 강제징용자 문제를 담당하는 실무자가 나와서 서명 명부만을 받아 갔을 뿐이었다. 한 마디로 문전박대였다.
이번 여운택옹의 문전박대에 대해서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는, "지난번에는 그나마 실무진이라도 나왔지, 이번에는 아예 실무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저번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라며 분노를 나타냈다.
여옹도 생각할 수록 부아가 치미는지 본사 로비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 회사는 나같은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피와 땀이 섞여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책임자 나와라. 나와!"
신일본제철의 부도덕함과 바로 이같은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절실함 때문인지, 여옹의 목소리는 90세에 가까운 노령이라고 보기 힘들만큼 쩌렁쩌렁하게 로비에 울려퍼졌다. 그래도 신일본제철 측은 요지부동이었다.
"회사 방침상 아무도 만나실 수 없습니다"
"그럼 못나오는 이유라도 말해라!"
이 같은 실갱이가 한참동안 계속됐다. 여옹은 일본까지 온 이상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고 버텼다. 이 같은 대치가 2시간 이상 계속됐다. 그러자 일본시민단체 관계자들은 혹여 89세인 여운택 옹이 고령인만큼 쓰러지지 않을까 조바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회사 측에 '여옹이 마실 수 있는 물이나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달라', 아니면 '자리를 옮겨 앉아서 얘기할 수 있는 휴게실 같은 곳으로 옮겨서 이야기하자'고 제의했지만, 이마저 신일본제철 측이 모두 거절했다.
결국 2시간 이상을 로비 한켠에서 선채로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마침내 12시즈음에 실랑이는 끝이 났다. 정오에 일본 참원의원 곤노 아즈마 의원과의 만남이 약속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12시 정각무렵 신일본제철 본사를 나와 참의원 의원회관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이 나오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책임자는 나와서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다."
신일본제철 본사에서 나오는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얼굴에 착잡함이 묻어 나왔다.
이날 이들이 신일본제철 본사를 방문한 이유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입장과 실상을 얘기하고 그에 대한 회사측의 대응방침에 대해 들어보려는 목적이었지만, 그들은 응대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애초부터 그들은 가해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고, 항의방문한 한국 국회의원과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문전박대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이들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보상하지 않는 이유를 들어보면 더 가관이다.
"일본제철의 현재 이름은 신일본제철. 이름만 바뀌었을 뿐 무엇하나 바뀐 것은 없다. 그런데 전신인 일본제철과 신일본제철은 다른 기업이란다. 그래서 보상을 못해주겠단다. 저들은 이런 비열한 짓을 한다." (여운택)
일본 정부와 사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 재판에서 이 같은 이유로 단 한번도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일본정부와 재판부의 판단은 기업측과 입을 맞춘듯이 똑같았다.
첫째, 신일본제철 혹은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기업의 전신이 지금 회사와는 이름이 다른 회사라는 것'.
둘째, '배상의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것.
셋째, 한일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
등의 이유였다. 특히 신일본제철은 포스코와 합작 및 기술제휴를 수차례 체결하는 등 한국기업과의 교류도 활발히 하고 있는 일본굴지의 대기업이었다. 그런데도 일제강점기 시절,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보상조치나 그 어떤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본 시민단체 회원 우에다 씨는 점심식사 후 기자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한국 언론입장에서, 포스코가 이 기업하고 제휴 맺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 사실 이해가 안갑니다. 이딴 기업과 어떻게 그런 협력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요."
과거 역사문제에 대해서 너무나도 문제의식이 없는 포스크에 대해서, 이 일본 시민단체 회원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몇번이고 기자에게 강조했다.
그 다음 일정은, '미래를 향해 전후 보상을 생각하는 의원 연맹' 소속 의원 곤노 아즈마 참원의원을 만나는 것이었다. 곤노 의원을 만나는 이유는, 현재 강제징용, 연행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 알리고, 강제노역자들의 당시 월급 통장이 있는지, 여부 확인을 금융청에 요청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강제징용돼 끌려온 노역자들에게 당시 일본기업은 월급을 저금해 나중에 통장으로 주겠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해, 한반도와 중국, 대만, 동남아시아 등 과거 일본이 패했거나 침략한 지역의 우체국에서, 당시 현지인을 포함한 주민, 군인이 저금했으나 찾아가지 않은 휴면계좌가 1,900만 개에 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에 한국 강제 노역 피해자들의 통장이 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
만약 강제징용자들의 통장이 있을 경우, 당시 정확한 소속 및 장소, 노역 내용 등 다양한 부대정보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정보가 된다. 과거 강제징용자들의 경우, 이 같은 부대정보가 없었던 탓에 보상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휴먼계좌 속에 당시 조선인 노역자들의 계좌가 발견될 경우, 보상받아야 할 정확한 액수의 내역까지도 알 수가 있다. 이를 알려면 누군가 정부관계자이거나 혹은 그에 상당하는 국회의원 신분정도는 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곤노 의원에게 강제징용자들의 통장 존재 여부를 금융청에 확인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신일본제철에서 너무 시간을 오래 끈 탓에 약속시간에 늦어진 일행은 곤노 아즈마 의원을 직접 만날 수 없었고, 그의 비서가 대신 나와 여운택 옹 일행의 설명을 들었다. 아쉽지만 관련 자료를 비서의 이메일로 보내기로 약속하고 그 자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날 일정이 모두 끝난 뒤, 여운택 옹은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떠났다.
연령상 앞으로 그가 일본에 올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번 일본 방문 일정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일본까지 와 가해 당사인 신일본제철을 찾아 갔지만 기대했던 성과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국으로 돌아가는 여옹의 어깨는 왠지 힘이 없고, 뒷모습이 매우 지쳐보였다.
▶"지쳤다. 심적, 육체적 고통 너무 크다" - 여운택 옹 인터뷰
- 언제, 어디서 강제노역을 했는가
"1943년 9월 10일, 평양시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일본제철 오사카제철소에서 기중기 운전을 했다. 1945년 6월에 청진 제철소로 옮겼다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을 선언한 이후 풀려나 남쪽으로 내려왔다."
"사실, 당시 인력모집공고가 있어서 그걸 보고 일본으로 갔다. 기술도 배우고, 대우도 일본인 대우를 해준다고 했다. 월급도 일한 기간동안 통장에 모아서 한번에 준다고 했다. 그래서 가게 됐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이야기와는 전혀 달랐다. 말그대로 속았다."
- 속았다니?
"외출의 자유도 없었고, 일을 쉬면 얻어 맞았다. 기숙사에서 단체 생활을 했는데, 그곳에 관리감독자가 있었다. 그에게 허락받아 외출했다. 마음대로 외출하거나, 일을 쉬면 여지없이 구타당했다."
- 함께 갔던 사람들 규모는 얼마나 되나?
"모집인원이 100명이었다. '훈련대원'이라는 명칭으로 평양에서 100명이 건너갔다. 제1기는 충북사람들이었고, 우리들이 2기였다."
- 결국 약속했던 월급도 받지 못했나?
"그렇다. 1943년에 일본 건너간 이래 일했던 돈은 전혀 받지 못했다. 1945년 6월에 청진 제철소로 갔다가 8.15 이후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청진에서도 2달간 일한 월급을 못받았다. 회사 내에 공탁해놓은 월급이 있는데 아직도 못받고 있다."
-신일본제철이 옛 전신인 일본제철과는 관련없다고 주장한다
"신일본제철이 떼를 쓰고 있다. 달라진 건 이름뿐, 다 그대로인데 관련이 없다니 매우 야비한 수법이다."
- 오늘 신일본제철 방문 성과가 좋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지쳤다. (일본와서) 심적, 육체적 고통이 너무 크다. 이 억울함을 어디다 풀 수도 없다. 내 수명도 얼마 안 남았고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착잡하다"
"한국 정부도 문제 있다. 그놈의 한일협정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부가 협정을 맺어놓고, 경제 살린답시고 다 썼다. 한국정부는 우리를 방치했다."
이지호 기자
마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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