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인배의 두근두근 시네마]
사랑, 삶과 죽음, 그리고 늙어가는 것
"우린 늙어가고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영화들을 보았다. 하지만 삶의 끝을 마주한다는 것의 본질을 이 영화만큼 정직하고, 잔인하고,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없었다"라는 토드 맥카시(할리우드 리포트)의 호평처럼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는 병마와 죽음 앞에서 마지막 자존감을 지키려는 노부부를 통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삶과 죽음, 늙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통렬한 성찰의 여운과 감동을 준다.
그런 만큼 '아무르'라는 제목은 프랑스어로 사랑이지만 삶과 죽음이 중첩되는 의미로 다시금 곱씹게 한다.
201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무르'는 제25회 유럽영화상 유러피안 감독상 (미카엘 하네케), 유러피안 남우주연상 (장-루이 트린티냥), 유러피안 여우주연상 (엠마누엘 리바), 유러피안 작품상 (미카엘 하네케) 그리고 제77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 제25회 시카고 비평가 협회상에서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했고 제38회 LA 비평가 협회상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타임과 뉴욕타임스가 뽑은 '2012년 최고 영화'로 선정된 '아무르'는 대박영화가 판을 치는 국내 극장가에서 30개관 미만에서 개봉하는 다양성 영화로서 개봉 18일 만에 3만 명을 돌파하여 수백만 명씩 동원하는 영화에 비하면 작은 수치지만 예술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일반상영관(CGV여의도)에서 확대 상영되고 있다.
화려한 수상 실적보다는 꾸준한 입소문으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영화는 대중적인 영화나 화끈한 킬링 타임용 영화를 기대한 관객에겐 따분하고 졸음을 유발하는 무거운 수면용 영화가 되겠지만, 삶을 통찰하게 하는 진정한 영화를 원하는 관객들에겐 한 치의 가식 없이 롱 테이크로 그대로 보여주는 노부부의 마지막 일상만으로도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눈물을 삼키게 할 작품이다.
그것은 뛰어난 연출은 물론, 80대 노부부인 조르주와 안느를 연기한 두 노배우의 관록이 넘치는 명연기에 기인한다.
196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끌로드 를르슈 감독의 '남과 여'(1966)로 국내 올드팬을 사로잡았고 1969년 '제트'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장 루이 트랭티냥이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과 눈빛, 그리고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남편 조르주의 심리 상태를 부각시키고, 누벨바그의 고전인 알랭 레네 감독의 1959년도 작품인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의 에마뉘엘 리바가 병마와 싸우면서 마지막까지 자존감을 지키려는 부인 안느의 내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멋진 신사였던 장 루이 트랭티냥과 미모의 여배우였던 엠마누엘 리바는 극중 노부부처럼 80대가 되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지만 깊게 패인 주름과 연륜, 그들이 주고받는 대사와 눈빛만으로도 오랜 세월 함께 한 노부부의 깊은 사랑과 죽음을 각인시켜준다.
이 영화는 구조대원들이 아파트 현관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와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안느의 시신을 발견하는 장면을 오프닝으로 플래쉬 백으로 전개된다.
그녀의 죽음은 자살일까?
80대 노부부인 조르주(장루이 트랭티냥)와 안느(에마뉘엘 리바)는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평생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믿음, 배려와 존경을 잃지 않는다.
조르주와 안느가 애제자인 알렉상드르(실제 피아니스트인 알렉상드르 타로)의 콘서트를 보고 즐겁게 귀가한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이 둘만의 아침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아내 안느의 병세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죽음의 그림자는 서서히 찾아온다.
수술을 받았지만 한 팔과 다리를 못 쓰는 안느는 퇴원한 뒤,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편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을 전혀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온몸이 마비된 안느는 말도 점점 무뎌지고 발음은 갈수록 어눌해지지만 온전한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조르주와 안느는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와 눈빛으로 소통하고 위로한다.
"약속해줘, 다신 병원에 입원시키지마"라는 안느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는 조르주는 자신의 추해져가는 육신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아내의 소망을 감지하고 타인은 물론, 간간이 찾아오는 중년의 딸 에바(이자벨 위페르)에게도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조르주와 안느의 집으로 한정된 이 영화의 공간은 자식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침범할 수 없는 가장 배타적인 공간이며 노부부만의 공간이다.
그런 만큼 시종 일관 노부부의 아파트에서 진행되는 이 영화는 극적 기교없이 절제된 영상과 담담하게 전개되는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롱 테이크로 중년과 노년 관객들은 물론, 간병이나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관객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조르주가 물을 떠 넣어주는데도 생을 마감하고 싶어 물을 거부하는 안느의 뺨을 조르주가 후려치는 장면이다.
가슴 깊이 눌러 삼켰던 헌신적인 조르주의 슬픔이 폭발하는 이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격렬한 순간으로 마지막까지 삶의 존엄을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노부부의 소원이 아프게 각인된다.
1942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노장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철학과 심리학, 연극을 공부했다. 그는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연극 희곡과 텔레비전 대본을 썼고, 시나리오 작업에 오랜 시간을 투자하였다.
47살이 되던 1989년, 첫 번째 장편영화인 '제7의 대륙'으로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폭력에 대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오스트리아 영화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992년에 발표한 '베니의 비디오', 1993년도 작품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들'은 빈에 살고 있던 한 중산층 일가의 실제 자살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제7의 대륙'을 잇는 그의 대표적 3부작으로 폭력과 미디어의 관계를 다뤄 큰 주목을 받았다.
1997년 '퍼니 게임'으로 폭력의 피해자와 폭력의 주체, 영화 속의 대상과 그것을 즐기는 관객의 위치를 교묘하게 뒤섞은 극단적인 형식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하네케 감독은 2009년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하얀 리본'을 비롯해 '히든', '피아니스트' 등에선 폭력과 권력, 죄책감, 금욕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영상화하며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을 스크린에 불어넣었다.
인간과 권력의 폭력적인 본성에 초점을 맞춰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충격으로 빠뜨렸던 미하엘 하네케는 '아무르'에선 삶과 죽음, 사랑과 인생에 대한 혜안을 밀도 있게 보여주면서 사랑, 삶과 죽음, 그리고 늙어가는 것에 대해 반추하게 한다.
'아무르'는 2013년 새해, 놓치기 아까운 두근두근 시네마이다.
<고인배 영화평론가 paulgo@paran.com>
[영화 '아무르' 스틸컷. 사진 = 티캐스트 제공]
김미리 기자 km8@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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