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마이데일리 = 허설희 기자] 팔색조보단 깊이를 원한다. 무대에 서면 설수록 더 깊어지고 싶고, 더 발전하는 자신과 마주하고 싶다. 이렇게 계속 무대에 설지 몰랐던 배우 강영석은 정신없이 1년을 달려 왔다. 이제 조금씩 무대의 무서움이 엄습해 오지만 그렇다고 외면하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무대다.
2011년 뮤지컬 ‘화랑’으로 처음 무대에 선 그는 군대에 다녀온 뒤 2014년 연극 ‘B성년’에 이어 연극 ‘모범생들’로 관객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이후 뮤지컬 ‘총각네 야채가게’, ‘쓰릴미’, ‘마마, 돈 크라이’에 연달아 출연하며 짧은 시간에도 불구 다수의 작품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는 음악극 ‘올드 위키드 송’과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무대를 병행하고 있다.
강영석이 현재 출연중인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1926년 나치 정권 아래의 독일, 저명한 심리학자 그라첸 박사의 대저택 방화 살인사건의 용의자인 네 명의 고아들과 보모 메리의 이야기를 범인을 추적하는 것이 아닌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추적하는 것에 중심을 두고 무게감 있게 그려낸 작품.
극중 강영석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미술가지만 쉽게 중심을 잃고 위태로운 성정을 지닌 둘째 헤르만 역을 맡았다. 이번 시즌 ‘블랙메리포핀스’는 시점을 바꿨다. ‘왜곡된 기억을 가진 자’인 둘째 헤르만을 내레이터로 정한 것. 이에 강영석의 역할 역시 커졌다.
강영석은 “내가 ‘블랙메리포핀스’ 무대에 설 줄은 몰랐다. 공연을 계속 하고 있을 줄도 몰랐는데 여기까지 오게 됐다”며 남다른 감회를 전했다.
사실 관객들의 열렬한 사랑에 힘입어 네 번째 무대에 올려지는 ‘블랙메리포핀스’ 합류는 조금 부담 되기도 했다. 특히 헤르만 버전으로 바뀌는 만큼 책임감이 커질 거라는 생각 역시 걱정이 됐다.
그러나 강영석은 “부담은 되지만 거기서 위축돼서 뭐하나.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지”라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하고 있는 것을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라며 당찬 매력을 드러냈다.
“헤르만은 하나로만 가는 게 아니라 입체적인 캐릭터예요. 뭐가 많죠. 제가 다 담아내는지 모르겠지만 그 부분 부분별로 다양하고 입체적인 부분을 찾아가는 게 힘들었어요. 화만 내서도 안 되고 참기만 해서도 안 되거든요. 사실 처음에 대본만 봤을 때는 헤르만이 한스한테 굉장히 찡찡대는 것 같았어요. 화만 내는 것 같고 좀 단순해 보였죠. 하지만 작품과 인물에 대해 공부하면서 복잡한 사정이 있는 캐릭터라는 걸 알게 됐죠. 제 머리도 그만큼 복잡해졌고요.(웃음) 그래서 연습 중반까진 잘 안 풀렸는데 연출님께 계속 물어보며 합의점을 찾았어요.”
강영석은 서윤미 연출의 말에 전적으로 의지하고자 했다. 연출, 극작, 작곡, 작사를 모두 맡아 사연까지 이어온 서연출에게 해답을 찾고자 했다. “작사, 작곡, 극작, 연출을 다 하셨으니까 해보다 보면 연출님 하는 말이 다 맞다는 걸 알게 된다. 약간 말을 잘 듣기도 해서 ‘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조금씩 바꿔갔다”고 고백했다.
“저는 사실 헤르만이 너무 화만 내고 소리 지르니까 시끄럽다고 했어요. 그런데 연출님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자제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제가 화가 많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저는 헤르만을 솔직하고 이성적이게 표현하려고 했어요. 냉정하고 직설적으로 하는 편이죠. 사실 헤르만 입장에서는 화낸 게 아닐 수도 있어요. 특히 헤르만 버전으로 보면 더 그렇죠. 그렇게 버전이 바뀌면서 헤르만의 입장과 표현도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아요.”
헤르만을 이해하기 시작하니 자신과 닮은 점도 보였다. 그는 “나도 약간 말을 직설적으로 한다. 속으론 감추고 있으면서 그 상황에 있어 솔직한 점이 비슷한 것 같다”며 “처음에는 헤르만과 되게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하면 할수록 좀 닮은 구석이 생기는 것 같다”고 밝혔다.
헤르만이 되니 ‘블랙메리포핀스’ 전체가 보였다.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됐다.
“‘블랙메리포핀스’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고 굉장히 안 좋은 기억이죠.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캐릭터들이 어떻게 해석하는가 보여주는 것 같아요. 거기서 헤르만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해결해 나가려 하는지가 보이죠. 저 같은 경우 트라우마가 없다고 생각하려고 하는게 트라우마라고 생각해요. 전 되게 스트레스도 안 받고 우울하거나 하는 경우도 없거든요. 그래서 그런 상황이 되려고 하면 순환시키려고 노력하고 진지하지 않으려 해요. 더 밝게 하려고 하죠. 그런 게 또 다른 느낌의 트라우마 같아요. 그런 게 없다고 생각하려고 하는 거요.”
자신은 트라우마가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블랙메리포핀스’ 인물들의 트라우마를 보다보니 자신의트라우마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됐다. 진지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던 그이지만 ‘블랙메리포핀스’ 분위기상 진지함도 소화해내야 했다. 그럴수록 헤르만과 더 가까워졌고 그의 디테일에도 더 신경 쓰게 됐다.
“디테일에 신경 쓰려고 하고 있어요. 약간 섬세하게 표현을 하려면 디테일이 많아야 되는데 사람이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챙기기가 쉽지 않긴 하죠. 하지만 그 상황에서 챙기려 해요. 사실 디테일은 공연 중에 많이 생겨요. 연습할 때랑은 관개들 앞에서 할 때랑 밀도가 다르니까 집중할 때 생각나는 것들이 고정되는 경우가 많아요. 언제나 집중해서 하기는 하지만 극장에서 관객들 앞에서 할 때랑 밀도가 굉장히 다르거든요. 항상 배우는 자세로, 공부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어요.”
어린 헤르만과 어른 헤르만을 다르게 표현하는 부분에도 디테일을 넣는다. 어린 시절이 잠깐이긴 해도 마냥 어린 애같이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대사가 적어도 그런 부분을 더 표현하고 싶다.
강영석은 “캐릭터들의 성격이 컸을 때 조금 남아 있어야 하는데 ‘블랙메리포핀스’ 아이들은 트라우마 때문에 어른이 되면 완전히 바뀌어서 고민이 많았다”며 “어릴 때를 연기할 때는 귀여운 느낌을 내는게 쉽지 않지만 해야 한다. 사실 14살, 중1이라는 나이가 표현하기 좀 애매하긴 한데 시대가 다르니까 조금은 조숙하게 표현하는 부분도 있다”고 털어놨다.
‘블랙메리포핀스’는 감정소비가 상당한 작품. 때문에 이러한 감정 소비는 강영석에게 다양한 감정을 가져다준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오히려 한두시간 정도 개운하고 업 된다. 막 울고 그러니까 그러는 것 같다”면서도 “그런데 한두시간 지나면 ‘아휴..’ 이렇게 된다. 사실 그 상황에서는 힘든데 끝나고나서 곧장은 해소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블랙메리포핀스’는 어두운 작품이지만 그래도 뭔가 희망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걸 보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아이들의 선택이 행복한 선택이라는 걸 전하고 싶죠. 워낙 불행하게 시작해서 불행하게 끝나기 때문에 그러지 못할 수도 있지만 행복하게 끝났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기억을 지우지 않고 이겨내며 살아가려 하잖아요. 그래서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두고 하고 있어요. 행복해지기 위해 그 기억도 갖고 가야죠. 그걸 다 가지고 있음으로써 한 사람이 완성되는 것 같아요.”
한편 강영석은 연기전공에 뮤지컬을 좋아하긴 했지만 자신이 뮤지컬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잡게 됐고, 그 기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계속해서 강영석을 무대에 오르게 했다.
“처음엔 잘 모르고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욕심도 생겨요. 더 잘 하고 싶고 좋은 거 다 하고 싶고 그래요. 그러려면 잘 해야죠. 지금 제가 잘 한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해요. 현실을 깨달았죠. 그러려면 더 열심히 레슨 받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재밌어서 계속 한 게 연기가 처음이거든요. 지금은 계속 무대에 서다보니 재미와 함께 정말 잘 해야 한다는 것을 더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 더 깊어지고 싶어요. 깊은 배우가 되고 싶죠. 팔색조 같은 배우 말고 나 자신이 깊고, 또 깊은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공연시간 100분. 2017년 1월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티오엠 1관.
[강영석. 사진 = 아시아브릿지컨텐츠 제공]
허설희 기자 husullll@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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