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이만하면 우민호 감독의 최고작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내부자들’의 명성을 단숨에 뛰어넘는다. 그 흔한 클리셰도 없고, 숨통을 틔워주는 유머도 없다. 오로지 전락과 파국의 한 가지 톤을 유지하며 팽팽한 긴장감으로 끌고간다. 역사의 숨소리마저 살려낸 생생하고 강렬한 웰메이드 누아르의 탄생이다. 10.26 사태를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만 알고 있던 관객은 이제 청와대와 궁정동 안가의 내부 깊숙이 들어가는 경험을 할 것이다.
10.26 사태가 일어나기 40일전,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이 미국 의회 청문회를 통해 전 세계에 박 대통령(이성민)의 실체를 고발하며 파란을 일으킨다. 현직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이 미국으로 급파돼 사건을 수습하려하고, 김 부장을 견제하는 대통령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도 발빠르게 움직인다. 18년간 이어진 독재정치의 파열음이 곳곳에서 터지고, 하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대통령 주변에는 반대세력과 충성세력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민심이 들끓으면서 김 부장과 곽 실장의 대립이 격화되고, 파국의 그림자는 시시각각 다가온다.
‘남산의 부장들’은 한국 정치 누아르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잔가지를 쳐낸 이 영화는 대통령 곁을 지키겠다는 김규평이 왜 방아쇠를 당겼는지에 집중하며 극도의 몰입력을 담아냈다. 충성과 혁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김규평, 외국을 떠돌며 대통령을 흔드는 박용각, 과잉 충성에 빠진 곽상천, ‘충성경쟁’을 시켜 권력을 유지하려는 대통령의 대립이 그야말로 치밀하면서도 처절하게 펼쳐진다.
1979년의 긴박한 시대상황을 고스란히 담아낸 세트와 로케이션도 볼만하다. 비극의 현장인 궁정동 안가를 비롯해 미국 워싱턴, 프랑스 파리 방돔 광장 등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배신의 드라마는 차갑고 건조하게 심장을 조여온다. 독재정치를 둘러싼 한국과 미국의 미묘한 관계, 2인자 자리를 놓고 격돌하는 권력욕 등 역사와 사회의 시공간적 맥락을 살려낸 연출의 세공력은 보기 드문 성취다.
누아르답게, 빛과 어둠을 활용해 인물의 감정을 잡아내는 디테일도 탁월하다. 특히 김규평의 얼굴을 다양한 각도의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며 서서히 어둠 속에 서서히 잠기게하는 촬영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빗물과 땀으로 뒤범벅이 된 김규평이 누군가의 대화를 엿듣는 대목에서도 어둠 속의 실낱같은 빛으로 인물의 흔들리는 내면을 포착해낸다. 그야말로, 숨이 턱턱 막히는 스릴감이다.
이병헌은 또 한 번의 인생연기를 펼쳤다. 눈빛과 호흡만으로도 김규평의 흔들리는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의 내면연기를 따라가다보면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마주친다. 높은 싱크로율로 카리스마를 발산한 이성민, 25kg을 증량하며 연기변신을 시도한 이희준, 생존의 불안감에 쫓기는 곽도원의 ‘연기 배틀’은 가히 역대급이다. 모두가 주연이라고 할 만큼 불꽃 튀는 열연이 스크린을 장악한다.
‘내부자들’에서도 알 수 있듯, 우민호 감독은 ‘권력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숨겨진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역사를 심장이 요동칠만큼 격렬하게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마지막 총성이 울린 뒤, 다큐멘터리 영상까지 보고 나면 감정적 여진이 더욱 세차게 휘몰아친다. 1979년 10월 26일, 한국 현대사의 비극 속으로 빨려들어간 당신은 오래도록 총소리를 잊지 못할 것이다.
[사진 = 쇼박스]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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