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교사 김혜인] "우울한 엄마가 아이에게 최악이야."
몇 년 전 친언니에게 했던 말이다. 내가 우울한 엄마가 될 줄도 모르고.
아이의 발달 지연과 정서 문제로 소아정신과에서 권한 애착 및 상호작용 검사를 받았다. 검사는 자유 놀이로 시작했다. 내가 아이와 놀아주며 몇 가지 미션을 수행하는 동안, 선생님이 아이 반응을 관찰하는 방식이었다.
아이는 이런 곳에 오면 자기를 선생님과 남겨두고 내가 나갈까봐 미리부터 울곤 한다. 이날 검사는 내가 계속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었지만, 아이는 내게서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아이 불안도가 높다는 결과가 나올 게 뻔했다.
약 한 시간 정도 진행하는 검사에서 나는 틈틈이 수십 장의 설문에 답했다. 익숙하게 아이와 나의 인적 사항, 아이가 태어난 주 수와 몸무게, 출산 시 연령 등을 적었다. 발달 정도, 상동 행동, 예민도와 관련된 문항이 있었다.
그런데 이어진 설문은 아이가 아니라 나에 대한 검사인가 싶을 정도로 양육자의 우울감과 스트레스에 대해 묻는 게 많았다. '나는 슬프다', '나는 불안하다' 등 질문에 점수를 매겨 답해야 했다.
최대한 빠르게 답을 했지만, 검사가 다 끝난 뒤에도 추가 설문지가 있었다. 검사 기관에서는 나머지를 집에서 완성하여 등기 우편으로 보내라고 했다.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추가 설문지도 아이에 대한 것보다 엄마에 대한 것이 훨씬 많았다.
엄마용 설문에는 미완성형 문장이 있었다. 문장 앞부분을 제시하고 그 뒷부분을 내가 떠오르는 대로 완성하는 검사였다. 그 가운데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은'처럼 내가 평소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 있어 난감했다.
게다가 분량이 꽤 많았다. 검사지에는 제한 시간이 없지만 최대한 빨리 답을 하라고 되어 있었다. 귀가 전 이미 많은 설문에 답했던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중간에 그만두고 나머지를 며칠 뒤로 미뤄 버렸다.
일주일 뒤쯤이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설문지를 다시 펼쳤다. ‘나의 장점은’을 끝으로 문장 완성형 설문을 마무리했다.
다음 설문지를 펼치니 이번에는 질문에 예, 아니오로 답하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문항이 576개나 되었다. ‘이 검사는 정말 사람을 질리게 한다’고 중얼거렸다.
드디어 다 끝낼 무렵 문자가 왔다. 온라인으로 답해야 하는 설문이 하나 더 있음을 잊고 있었다. 기한 내에 응답을 완료하라는 알림 문자였다. 한숨을 쉬며 링크를 열었다. 역시 나의 육아 스트레스 정도를 파악하는 질문이 대다수였다. 끝없이 내가 우울한지 자문하며 설문에 답하다 보니, 없던 우울증까지 생기는 기분이었다.
양육자에 대한 설문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아이 애착에 엄마 정서 상태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엄마 정서는 아이에게 전달된다. 아이의 발달 지연과 정서 문제로 진료를 보았지만, 이 검사는 아이가 아니라 나에 대한 검사일 수도 있다.
'나는 우울한가?', '나는 육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가?' 떠오르는 대로 솔직하게, 현재 상태대로 답하라 했다. 그러나 무엇이든 쉽게 답하기 어려웠다. 아이가 잘 놀고 자주 웃을 때는 나도 행복하다. 하지만 아이가 발버둥치며 떼를 쓰면 그렇지 않다. 아이를 키우며 경험하는 감정을 1에서 5 사이의 점수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최근 며칠 동안 아이는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바닥을 구르며 떼를 쓴다. 달래다가 지쳐서 그냥 내버려 두고 침대에 누워 버렸다.
흔히 말한다. "엄마가 힘을 내야지, 엄마가 우울하면 안 돼." 괜히 심술이 난다. 엄마는 이럴 때도 우울할 수 없다니. 힘을 낼 수 없는데 힘을 내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울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우울하면 안 된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엄마가 우울하면 안 된다는 게 나를 더 우울하고 지치게 만들었다.
그런데 참 우습기도 하지. '나의 장점은'으로 시작하는 미완성 문장을 내가 이렇게 완성했다는 사실이. '나의 장점은......다시 힘을 내어 일어선다는 것이다.' 제풀에 지쳤는지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같이 놀자는 듯이 내 손을 잡아 이끈다. 그래, 나는 다시 힘을 내어 침대에서 일어난다.
|김혜인. 중견 교사이자 초보 엄마. 느린 아이와 느긋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교사 김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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