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종합
‘재일동포.’ 이 네 글자에는 유난히 많은 눈물이 고여 있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삶은 몹시 고달프다. 한국에서 재일동포로 산다는 것도 어렵고 힘들다. 모국에서 받는 차별과 멸시 때문에 더 가슴 시릴지 모른다. 실핏줄 터진 눈에서 쏟아지는 김지수의 눈물은 그래서 모든 재일동포의 눈물이다.
김지수 선수는 파리올림픽 유도 혼성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땄다. 재일동포 유도선수로는 허미미에 이어 6번째. 김지수는 개인전에서 안타깝게 메달을 놓친 뒤 펑펑 울었다. 그러나 단체전에서는 두 눈의 실핏줄이 다 터지는 투혼 끝에 꿈을 이뤘다. 또 눈물을 쏟았다.
많은 한국선수들이 파리올림픽에서 기쁨의,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60대 중반의 사격감독도 어린 선수들을 얼싸안고 울었다. 그만큼 올림픽은 가슴 절절한 제전. 하지만 재일동포 3세인 김지수의 눈물은 남다르다. 그 속에는 재일동포의 맵고 신 삶이 담겨있다.
■일본의 가장 밑바닥에서 번 돈을 아낌없이 모국에 보냈다
대한민국 유도는 물론 올림픽 역사에는 재일동포의 혼과 숨결이 깊이 베여있다. 그들의 피땀 어린 모국 사랑이 한국을 스포츠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가난한 ‘본국’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2세, 3세 선수들을 보냈다. 일본의 가장 밑바닥에서, 진저리 치는 고통을 이기며 번 돈을 아낌없이 보냈다.
건국 후 첫 올림픽 출전은 1948년 런던 올림픽. 선수단은 재일동포들의 도움으로 런던에 갔다. 선수단은 부산에서 배로 시모노세키에 간 뒤 기차로 오사카까지 갔다. 어렵게 나라를 세운 모국 선수들을 맞이한 동포들은 다 울었다. 선수단은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홍콩으로 가 런던 비행기에 올랐다. 동포들은 항공료에다 선수복·각종 시합 용구까지 다 마련해 주었다.
52년 헬싱키 올림픽도 항공비 등 출전 경비를 재일동포들이 거의 다 부담했다. 70여 년 전 1천만 엔이란 큰돈이었다. 64년 도쿄올림픽. 동포들은 ‘재일한국인 후원회’를 만들어 매일 식사를 대고 응원을 펼쳤다. 선수들에게 용돈까지 줬다. 한국정부의 요청으로 재일동포 유도선수들이 출전했다. 그 가운데 김의태 선수가 한국 유도사상 첫 동메달을 땄다.
그때 장창선 선수는 레슬링 사상 첫 은메달을 땄다. 그 원동력은 63년 가을, 3개월 도쿄에서 가진 합숙. 한국 최고 장창선도 특별 참가한 일본 대표 선발전에서 21명 중 19위. 하지만 3개월 만에 4위까지 올라갔다. 결국 올림픽 은메달로 이어졌다. 그는 ‘재일본대한체육회’가 빌린 도쿄의 여관에서 합숙했다. 메달을 딴 뒤 “그 훈련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재일동포들이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88년 서울올림픽 때 재일동포들은 일본 전역을 돌며 모금운동을 벌였다. 100억 엔을 모았다. 당시 환율로 540억 원. 모금을 주도했던 이희건 전 신한금융회장은 다케시타 노부로 일본 총리를 만나 “재일동포 후원금에 세금 감면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다케시타 총리는 바로 승낙했다. 뒷날 다케시타 총리는 이 회장에게 “아무리 많아도 10억 엔 정도라 생각해 승낙했다. 100억 엔이라 깜짝 놀랐다. 일본 정부가 큰 손실을 봤다”며 웃었다. 재일동포의 올림픽 성금은 올림픽공원 체조·수영·테니스 3개 경기장과 대한체육회 본부·미사리 조정경기장을 모두 짓고도 남을 정도로 많았다. 수십여 년 동안 일본에서 시합하는 한국 선수치고 출전 경비 등 재일동포들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재일동포들은 공업단지 건설 등 한국경제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1997년 외환위기. 동포들은 외화송금운동을 벌였다. 100억 엔이 목표. 그러나 900억 엔을 모았다. 당시 환율로 15억 달러 가량. 금모으기 운동으로 약 20억 달러가 모인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큰돈인가. 지금 일본 대사관과 총영사관 건물 10개 가운데 9개가 재일동포들의 돈으로 세워졌다. 그들은 건물 하나씩 세울 때마다 울고 또 울었다. 그런 공헌을 하면서도 재일동포들은 모국의 무시·차별을 감내해야 했다. 야쿠자들의 돈이라는 욕까지 먹어야 했다.
김의태는 도쿄올림픽 준비 6개월간 비용을 한국이 주지 않았다. 가난하기 그지없던 부모가 무리해 마련했다. 그는 “당시 10만 엔이라면 엄청난 돈. 수십 년이 지나서도 그때를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한국대표 훈련도 힘들었다. 동료들이 일본인처럼 취급했다. 잘 사는 일본에서 재일동포가 혜택을 받고 있다는 등 터무니없는 시기를 했다. 그러나 동메달을 모국에 선물했다. 76년 몬트리올 유도 감독으로 재일동포 박영철 선수가 동메달을 따도록 만들었다.
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한국은 단 하나의 메달만 땄다. 바로 유도 재일동포 오승립 선수의 은메달. 그런 성적을 모국에 바치고도 그는 있을 수 없는 모멸을 겪었다. 오승립은 결승전 10분 중 9분 40초 동안 일본의 세키네 시노부를 압도했다. 그러나 남은 시간에 약간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판정패. 일본이 지배하는 유도계라 일본의 농간으로도 볼 수 있는 억울한 결과.
그러나 선수단 중에는 “너, 일본에 살기 때문에 일본에 져준 거냐”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재일동포에 대한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었다. 어느 동포가 일본에 일부러 져 주겠는가? 오승립은 분노했다. “시합하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런 말이 나오는가? 모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무도 지고 싶어 지는 사람은 없다”며 울분을 터트렸다.
도대체 ‘본국’은 오승립 등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한국인들 가운데는 여전히 재일동포를 ‘쪽발이’라 부르며 상처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 단어는 일본인들을 얕잡아 부를 때 쓰는 것. 어떻게 재일동포가 ‘쪽발이’인가. 그래서 한국에서 모국을 느끼지 못한다는 동포들이 적지 않다. 모국이 그들을 품어주지 않기 때문. ‘영원한 이방인,’ ‘반쪽자리 인생’이라며 정체성 혼란에 괴로워한다. 본국의 냉대에 좌절하기 일쑤다.
■추성훈 앞에 박영철의 차별 판정
76년 몬트리얼 올림픽 동메달의 박영철도 한국에서 심한 차별을 겪었다. 그는 교토의 초등학교 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유도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중학교 유망 선수였으나 개인전 출전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일본의 차별을 극복하는 방법은 한국대표가 되는 것. 대표 선발 결승전까지 갔다. 그러나 박영철이 아무리 상대를 넘어뜨려도 심판은 인정하지 않았다. 판정패. 재일동포들은 지금까지도 ‘재일동포 = 일본인’이라는 차별 탓이라고 본다. 추성훈 선수의 억울한 판정 문제가 이미 20여 년 전에 일어났던 것.
박영철은 그대로 경기장에 주저앉았다. ‘재일본대한유도회’ 회장도 강력히 항의했다. 경기는 다시 치러졌다. 그는 끝내 이기고 대표가 되었다. 회장은 박영철에게 “그냥 다다미에서 내려왔으면 졌을 거야”라고 말했다. 재일동포기에 감당해야 했던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재일동포 선수마다 모국이 아픔을 준 처절한 역사가 있다.
재일동포 선배들의 고난이 김지수의 가슴 속 눈물로 솟구친 것이 아닐까. 그런 과거를 극복했기에 그 눈물은 아름답다.
김지수의 어머니는 서울 출신. 아버지 김덕제 씨는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재일동포 2세. 그는 “어린 나이에 ‘올림픽을 목표로 한다’는 딸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생일에 집 창고를 고친 연습장을 선물했다”고 일본 신문에 말했다. 유도 경험으로 딸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김지수는 고교 1년 때 일본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한국 전국체전에 참가하면서 “재일동포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해 2월 일본 전국중학대회에서 입상한 여동생과 함께 태극기와 한글 이름이 새겨진 도쿄올림픽 도복을 입고 일본 중학생들을 상대로 시범 지도를 했다.
허미미가 은메달을 따자 모교 와세다 대는 “‘재일한국인’ 허해실(許海実), 재학생 첫 메달”이라며 축하했다. 총장도 “한국·일본을 오가며 공부도 열심히 하는 노력”에 경의를 보냈다.
김지수·허미미도 일본의 차별을 피해 온 모국에서 많은 차별을 겪었으리라. 김지수 눈물의 의미를 승패에만 가두지 말자. 그것은 재일동포의 눈물이다. 우리 모두 그 속에서 재일동포의 아픔을 함께 느끼자. 그들을 다함없이 끌어안자.
손태규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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