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
[시조시인·여행작가 신양란] ‘나는 지금 갭이어 중입니다.’
30년 가까운 직장생활을 명예롭게 마감한 바로 그 다음 날, 새벽 인천공항 라운지에 앉아 카카오톡 프로필을 이렇게 바꾸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8년 전인 2016년 9월 1일의 일이다.
그 순간 가슴이 두근두근 떨렸다. 첫 출근하던 날 느꼈던 강렬한 설렘을 퇴직한 다음 날 똑같이 느낄 수 있다니, 나는 정말 행복한 은퇴자였다. 너무 좋아서, 너무 뿌듯해서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뒤설렜다.
나의 여러 가지 꿈 목록 중에서 하나가 지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은퇴한 다음 날 아침, 인천공항으로 달려간다’였다.
그 순간은 또 다른 꿈 목록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중이기도 했다. 바로 ‘은퇴 후 첫 일 년은 갭이어 기간으로 한다’는 결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갭이어(Gap year)는 원래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소년이 대학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일 년 정도 학업 부담에서 벗어나 자기 계발 시간을 갖는 걸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약간 변형되어 군 복무를 마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기 전이나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하기 전, 혹은 다니던 직장을 나온 뒤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일에 할애하는 기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어차피 갭이어가 원래 의미에서 벗어나 쓰인다면, 은퇴자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일 년 정도 자유 시간을 갖는 것까지 포함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명예퇴직을 신청하기 전부터 은퇴 후 갭이어를 갖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슴에 품었다.
명예퇴직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는 공문을 받은 날, 나는 가족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난 일 년 동안 갭이어를 가질 거야. 앞으로 여행작가로 살 작정이니까 주로 여행을 하겠어. 퇴직금에서 2000만 원을 떼어 갭이어 자금으로 삼을 건데, 그동안 개미처럼 열심히 일했으니 일 년은 베짱이처럼 살아도 돼.”
갭이어 기간 열여섯 차례 여행을 다녀왔는데 첫 여행지는 필리핀 세부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다 올 수 있는 곳, 그동안 간 적 없는 곳, 약속한 강의 일정 전 돌아올 수 있는 곳 등에 두루 부합했다.
세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입국 신고서에 직업을 기재하는데, 그동안 습관적으로 써왔던 ‘교사’를 버리고 ‘여행작가’라고 적으며 또 가슴이 설렜다. ‘아, 이제 정말로 인생 2막 무대에 올라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퇴직이 마침표가 아니라는 생각, 더 이어질 문장을 위해 갭이어란 쉼표를 찍는 용기를 가졌다는 생각이 날 한없이 뿌듯하게 만들었다.
여행 성수기를 지난 세부는 조금 한산했다. 그래도 난 좋기만 했다. 그 시간에 새 학기가 시작되어 정신없이 일하고 있을 옛 동료들을 생각하며 악마처럼 낄낄 웃었다. ‘난 백수지롱. 백수는 지금 세부에 있지롱’ 하며.
그렇게 시작된 갭이어 일 년은 2000만 원을 다 쓰고 끝났다. 매달 한두 번씩 새벽에 나를 공항에 데려다주며 남편이 “백수가 과로사한다는데, 우리 집은 백수의 남편이 과로사하겠다”고 투덜댄 것을 제외한다면, 별문제가 없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런 선택을 한 나에게 매우 후한 점수를 준다.
평생에 한 번쯤 갭이어를 갖고, 하고 싶었던 일을 원 없이 해보는 건 어떨까. 그럴 수 없는 아흔아홉 가지 이유에 귀 기울이지 말고, 꼭 그러고 싶다는 한 가지 욕망에 굴복하는 무책임에 자신을 맡겨보는 건 어떨까.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여행자의 성당 공부><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신양란 작가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