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
[시조시인·여행작가 신양란] 10여 년 전 보름 동안 10개국 21개 도시를 보는 서유럽 일주 패키지여행을 한 적이 있다. 영국 런던으로 들어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나오는 루트였는데, 하루에 두어 개 도시를 보고 저녁에 국경을 넘는 일이 다반사인 빡센 상품이었다.
런던을 먼저 본 다음, 유로스타를 이용해 벨기에 브뤼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부터는 전용 버스로 투어를 진행했는데, 참으로 가지가지 말썽이 많은 여행이었다.
브뤼셀에서 처음 만난 기사가 장염에 걸렸다며 프랑스 디종에서 다른 기사에게 운전대를 넘기고 떠났다. 새로 온 기사는 뚱한 인상에 뭐가 그리 불만인지 툴툴대는 일이 잦았다. 여름 성수기라 쉴 틈 없이 억지로 불려와서 그런 듯했다.
기사가 그러면 차라도 말썽을 부리지 말아야 하는데, 모나코에서 버스 에어컨이 고장 나 버렸다. 금요일 저녁에 로마에 도착했는데, 여분의 차도 없고 자동차 정비소는 이미 문을 닫아 고칠 수도 없다고 했다. 다음 날은 토요일이라서, 그다음 날은 일요일이라서 못 고친 채로 찜통 버스에 짐짝처럼 실려 다니는 신세가 되고 보니 죽을 맛이었다.
사실은 너무 빡빡한 일정이라 고장 난 에어컨을 수리할 시간이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일 거다. 프로그램에 제시된 장소마다 발도장을 찍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가이드 입장에서는 에어컨을 못 고치더라도 일정은 강행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며칠 동안 바람 한 톨 들어오지 않는 버스를 타고 다니며 녹초가 된 사람들이 이탈리아 베네치아 호텔에 도착해 마침내 분통을 터뜨리는 일이 생겼다. 10분이면 도착한다던 베네치아 호텔을 무려 두 시간 동안 헤매다가 겨우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 버스에 장착된 엉성한 네비게이션을 보니 기사 처지가 이해되는 면도 있기는 했지만, 신경이 날카로워진 사람들이 일제히 가이드에게 큰소리를 내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같은 기사가 퓌센에서 또 길을 못 찾고 한참을 헤매 버스 안 분위기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나마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새 버스로 교체해 에어컨 문제를 해결됐던 차였는데 말이다.
이에 좌불안석이 된 가이드는 같은 독일 내 로텐부르크 숙소마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큰 사달이 날 거라고 예감했는지, 퓌센 노이슈반스타인성 투어를 건성건성 진행했다. 어서 빨리 로텐부르크로 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한 듯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사가 로텐부르크 숙소를 너무 금세 잘 찾아 문제였다. 오후 세 시경에 숙소에 도착하고 보니 기나긴 여름 해가 아직 중천에 떠 있었다.
로텐부르크 시내 투어는 원래 프로그램에는 없었다. 로텐부르크는 숙소가 저렴한지 그곳에서 잠만 잔 다음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가이드는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뿔이 잔뜩 난 손님을 달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로텐부르크 무료 투어를 제안했다.
사실 로텐부르크는 이렇게 지나칠 곳이 아니다. ‘로맨틱 가도의 보석상자’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곳이라 언제든 꼭 한번쯤 보고 싶었는데, 패키지여행에서 포함 상품이 없어 아쉽던 차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이드 제안은 나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감히 청하지는 못 하지만 간절히 바라는 바임)’이었다.
패키지여행 상품은 기본 일정에 들어간 곳이 아니라면 선택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따로 내고 봐야 한다. 로텐부르크라면 몇십 유로를 내고라도 보고 싶은 곳인데 거길 공짜로 볼 수 있다니 감지덕지 아닌가.
그런 사정으로 서너 시간 동안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로텐부르크를 둘러볼 수 있었는데, 워낙 작은 도시다 보니 짧은 시간임에도 꽤 만족스러웠다.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중세시대 건물은 하나하나 매력적이었다.
공짜여서 좋았던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돈을 냈어도 그 도시는 여전히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게 분명하다. 나는 프로그램이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면 속살을 볼 가능성이 없었던 이 ‘로맨틱 가도의 보석상자’를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덕분에 열어볼 수 있었던 행운에 기뻐할 따름이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여행자의 성당 공부><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신양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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