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교사 김혜인] 남편에게 아이 저녁 식사를 맡기고 집 근처 5분 거리 북카페로 향했다. 신간 <마음 단련>을 내놓은 정신과 전문의 한덕현 교수 북토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런 행사에 자주 다녔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뒤로는 처음이었다. 책이 곧 인테리어가 되는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한낮에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날 저녁 북토크 전에는 아이와 수목원에 다녀왔다. 정확히 말하면 수목원 입구에 다녀왔다. 아이가 공원이나 놀이터를 좋아해서 야외 수목원에 데려갔는데,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즐겁게 온 아이가 막상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나가고 싶어 했다.
남들보다 불안이 높은 아이라는 걸 이해한 뒤부터는 아이가 힘들어하는 일은 애써 권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은 왠지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오랜만에 꽃구경하고 싶었는데 아이가 입구에서 버티고 있으니 아쉬움을 넘어 심지어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저 멀리 다른 아이가 분수에 손을 뻗으며 노는 모습을 보며, 울고 있는 내 아이가 더 야속했다.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며 조금 달래보면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안으로 더 들어가다가 아이 눈물 콧물만 쏙 빼고 나왔다.
북토크에서 한덕현 교수 이야기를 잠잠히 들으며, 아이의 불안을 다시 생각했다. 아이에게 수목원은 공원과 다르게 보일 수 있겠지. 처음 와 본 곳인데 엄마가 자꾸 앞서가 버리니 불안했겠지. 아이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더 기다려야 했다고 반성했다.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을 때 질문할 기회를 얻었다. 발달 지연 진단을 받은 30개월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고 나를 소개했다. 아이가 불안이 높다는 소견을 들었는데, 이런 아이를 키울 때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물었다.
개인 상담을 받는 시간도 아닌데 한덕현 교수는 고맙게도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조언은 “아이가 진단받은 발달 수준으로 아이를 대하라”는 말이었다.
만일 아이가 18개월쯤으로 진단된다면, 다른 아이와 비교하며 ‘왜 이게 안 될까?’라고 생각하지 말고 ‘아직 18개월인데 좀 더 기다리지 뭐.’ 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했다. 다른 아이에겐 1년인 시간이 내 아이에겐 2년이 될 수도 있다고.
그 말이 마음에 맴돌았다. 1년을 2년으로 사는 아이. 아이는 남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사는 모양이다. 즐거움도 불안도 충분히 다 느끼면서 사느라 그렇게 웃기도 울기도 잘하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내 아이야말로 자기 삶을 참으로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시간은 늘 단숨에 훌쩍 가버려서 아쉬웠는데 말이다.
북토크가 끝나고 남편에게 전화하니, 아이와 집 밖에 있다고 했다. 아마 놀이터에서 집까지 10분이면 올 거리를 또 1시간 걸려 오는 중인 듯했다.
아이는 요즘 길에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느라 짧은 거리를 가는 데도 시간이 몇 배가 든다. 땅바닥에 있는 물 자국과 맨홀 뚜껑을 하나씩 다 가리키고, 가게 앞 입간판에 새겨진 전화번호를 양쪽을 오가며 확인한다. 주차장 출입구에서 출입 경고 사이렌과 차단기를 구경하고, 문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다 열어보려고 한다. 버스에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배수구 위에 쪼그리고 앉아 그 속을 들여다본다.
한덕현 교수 말대로, 느긋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집에 도착하는데…. 좀 더 기다리지 뭐.
|김혜인. 중견 교사이자 초보 엄마. 느린 아이와 느긋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교사 김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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