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야구
‘한신 타이거스의 4번 타자’ 오오야마 유스케(大山悠輔‧29)가 일본 프로야구를 들었다 놓았다. 자유계약선수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가는 것이 굳어졌다”고 했다. 겨울야구 가장 큰 뉴스.
그러나 11월29일, 그는 요미우리의 6년 24억 엔(약 225억 원)을 마다하고 5년 17억 엔(약 160억 원‧추정)에 한신 잔류를 선언했다. 야구계는 깜짝 놀랐다. “왜 훨씬 좋은 조건을 뿌리쳤는가?” 며칠이 지나도 의문은 계속됐다.
오오야마는 2016년 신인 선발 때 파란을 일으켰다. “실력이 안 되는 1순위.” 현장은 충격의 도가니. 한신 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때부터 ‘한국인’이란 소문이 돌았다.
■재일동포 감독이 뽑은 신인 1위는 ‘한국인’인가?
일본인들은 “오사카 출신의 프로야구 선수 80% 이상이 한국인이다. 특히 교토 출신 선수의 90% 이상은 한국계란 생각이 든다”고 얘기한다. 터무니없지는 않다. 한신에서 날리던 재일동포 히야마 신지로(桧山進次郎·55)는 2008년 “프로 1군 선수 대부분이 한국인이란 이야기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스스로 밝히기 어려운 풍토 탓에 늘 소문만 돌 뿐이다.
오오야먀 얼굴이 매체에 오르내리자 “딱 보면 한국 사람 얼굴.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라고들 했다. 어떤 증거도 없었다. 다만 “오오야마란 성은 한국인들이 쓴다”는 말은 맞다. 극진공수도 창시자 최영의의 일본 성도 ‘오오야마(大山倍達).’ 일제 때 한국·일본에서 ‘오오야마’로 성을 바꾼 한국인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이 밝히지 않는 한 오오야마 선수가 한국인인지는 알기 어렵다.
‘오오야마 한국인’ 설이 더 힘을 얻은 이유는 당시 한신 감독이 카네모토 토모아키(金本知憲·56)였기 때문. 원래 ‘김박성’이란 이름의 재일동포. 그가 구단 회의에서 원래 지명키로 했던 선수 대신 오오야마를 선발일 아침에야 1위로 우겼다는 것.
오오야마도 일미대학야구대회 대표선수에다 대학 4번 타자. 그러나 1위 실력은 아니라는 평가였다. 선발 뒤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자 “너무 닮았다. 한국인들이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같은 재일한국인 감독이 정실로 뽑았다”고 수군댔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 자리에서 비명 지른 사람 모두를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심정은 지금도 있다.” 그 정도로 오오야마는 서운했다. 하지만 카네모토의 눈은 정확했다. 얼마 안 가 오오야마는 ‘한신의 대포’로 우뚝 섰다. 카네모토의 유별나게 끈끈한 동포 사랑을 감안하면 ‘의리 선발’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실력자를 제대로 골랐다. 오오야마가 한국인인지, 그래서 뽑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형제”로 불린 동포 선수들
‘카네모토’ 하면 반드시 따라다니는 이름이 아라이 타카히로(新井貴浩·47). 현재 히로시마 카프스 감독. 한국이름 박귀호인 재일동포. 히로시마 2군 타격 코치 박양태(新井良太·41)는 친동생.
카네모토와 아라이는 “형제‘로 불린다. 같은 한민족이 아니면 도저히 맺기 힘든 독특한 사이로 너무나 유명하다. 일본인들도 ”재일한국인들이니까 그렇다“고 인정한다.
카네모토는 “1,492경기 연속, 13,6869회 교체 없이 출전”이란 세계기록을 세운 “철인.” 일본 역사상 7번째 ‘트리플 스리(한 시즌 타율 3할·30홈런·30도루)’도 달성. 실력은 물론 경기·훈련에 온 힘을 다 쏟아붓는 태도와 구단 분위기를 소중히 여기는 인품 덕분에 “형님”으로 불렸다. 16~18년에는 한신 감독. 야구전당에 헌액되었다.
대선수 장훈처럼 카네모토·아라이 모두 히로시마 출신. 카네모토는 1986년 재일한국인 학생 야구단 선수, 아라이는 1994년 봉황대기대회에 재일동포 선수로 한국 방문을 했었다.
‘新井(신정)’은 신라 박혁거세가 우물에서 태어났다 해서 박 씨들이 많이 선택한 일본 성. 고국을 새겨 넣은 아라이 성의 재일동포 프로선수들이 여럿 있었다. 아라이는 2000안타·300홈런·리그 우승·리그 최우수선수를 한 시즌에 이룬 내야수. 39세 최우수선수는 일본 기록. 홈런왕·타점왕에도 올랐다. 일본프로야구 선수회장도 지냈다.
아라이에게 카네모토는 절대 존재다. 그를 매우 따랐다. 그저 야구 선배가 아니었다. "카네모토 선배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 두 사람은 히로시마에서 4년간 함께 뛰었다. 아라이는 1군에 가기 전, 훈련을 쉬려 하면 카네모토에게 혼났다. 강제로 훈련해야 했다. 두 사람은 절에서 혹독한 고행 수행도 함께 도전했다.
아라이는 FA가 되자 “다시 한 번 카네모토와 함께 야구를 하고 싶다”며 그를 쫓아 한신으로 옮겼다. 두 사람은 번갈아 4번 타자로 뛰며 2005년 홈런왕 경쟁을 했다. 카네모토가 40홈런을 쳤으나 아라이가 43홈런으로 1위.
카네모토(김박성)·아라이(박귀호)만이 아니었다. 한신에는 히야마(황진환)·박양태 등 재일동포 4명이 10년 이상 4번 타자를 서로 주고받으며 우승 등을 이끌었다. 이러니 “모조리 재일한국인”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카네모토가 한신 감독이 되면서 아라이와는 스승-제자. 아라이는 히로시마에서 은퇴했으나 카네모토 한신 감독에게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렸다.
■“철인” 선배의 후배 “괴롭히기”…일본인들도 인정한 동포애였다
이들이 특히 “유별난 형제”로 꼽힌 것은 카네모토의 “아라이 괴롭히기” 때문. “카네모토의 취미”로 불렸다. 카네모토는 홈런을 치면 다른 선수들과 손바닥만 마주쳤으나 아라이만 손바닥을 세게 때렸다. 원정 숙소에서도 자주 장난쳤다. “호텔에서 한밤중에 아라이 방 벨을 누르고 달아났다. 그러자 몰래 방을 바꿔버렸다. 바뀐 방도 알아내 계속 그러니 다른 층으로 옮겨가더라(웃음).” 아라이가 새벽 3시에 전화를 받으면 카네모토. “빨리 안자고 뭐 하나. 그러니 찬스 때 못 치는 것이다.”
2007년, 아라이가 한신에서 같이 뛰게 되었을 때 “카네모토 선배는 저를 동생처럼 생각해 주신다”고 말했다. 입버릇처럼 “정말로 동생 같은 존재”라던 카네모토는 “남이라고 생각하는데...”라고 농담했다. 카네모토가 경기 후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아라이 선수를 놀리는 것은 거의 “전통”이었다. FA로 주목받던 아라이가 한신에 남자 “타순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도 그 녀석이 4번 타자인 건 납득할 수 없다”고 농담했다. 11년 시즌 개막 전에는 “아라이는 아직도 현역인가?”라며 놀렸다. 카네모토는 아라이의 삼진왕·병살왕을 기념한 티셔츠를 제작해 직접 입기도 했다.
카네모토가 감독을 그만둔 뒤 두 사람은 함께 해설자로 활동했다. 방송 출연한 아라이는 아홉 살 많은 카네모토에 대한 질문을 받자 “내가 형이다. 카네모토 씨는 동생 같은 존재다.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전보다 더 친절해졌다. (감독 때)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 많이 성장했다”고 말했다. 스스럼없는 때리기. 그야말로 친형제나 다름없음을 다시 확인했다.
카네모토의 장난·놀림은 아라이만의 개성을 만들어 주었다. 그것들이 인터넷에 확산되면서 아라이의 매력이 널리 알려졌다. 프로야구에서 아라이는 189cm 큰 덩치답지 않게 보기 드문 ‘귀여운 개성’을 가진 선수로 자리 잡았다.
아무런 악의 없는 짓궂은 장난은 카네모토의 애정 표현 방식. 일본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아라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 받아주었다. 어떤 불만도 감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만큼 두 사람의 정은 두텁고 따뜻했다.
일본인들도 다 인정했듯 한국 사람들끼리라 가능했을 터. 모진 멸시 속에서 가장 밑바닥 삶을 이어온 1대 2대로부터 물려받은 한민족 정서·문화가 낳은 아름다운 사이였다. 동포끼리 그렇게 뭉치고 아껴주지 않으면 고통스런 남의 나라 생활을 어떻게 이겨내고 정상에 설 수 있었었겠는가.
카네모토는 히야마와도 각별한 사이. 해설자 히야마는 수시로 카네모토 감독의 연습장을 방문하고 매체에서 함께 대담했다. 둘은 1987년 재일동포 선수단으로 함께 한국에 왔었다. 일미 대학야구대회 대표로도 뽑혔었다. 히야마는 한신에서 4번 타자를 거쳐 “대타의 신”으로 불렸다. 교토 출신이지만 오사카 일대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두 사람은 “신인 선발 4위 전설”로 유명하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스즈키 이치로, 카네모토, 히야마 등 4명은 1991년 각 구단 4위에 뽑혔다. 그러나 이들 모두 뒷날 1-3위들을 뛰어넘는 대선수들이 되었기 때문.
■지면 안 되는 정신력과 동포애로 일본 프로야구를 평정했다
선수 때 히야마는 동포 신문 회견에서 “한국인의 혼을 보여주고 싶다. 일본 야구에는 귀화한 선수 등 한국인이 많다. 1군 선수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인 선수는) 식생활의 차이로 인해 체격이 크고 체력이 강하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그는 프로 입단서류 국적란에 “한국”이라 적었다. 평소에도 자신이 한국인임을 숨기지 않았다. 선수 시절 내내 한국 국적을 유지할 정도로 모국 사랑이 강했다. 일본 야구계와 재일동포 사회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들은 눈물겨운 동포애로 서로 돕고 의지하며 일본 프로야구를 평정했다. 그러나 자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른이 넘어 귀화했다. 이들 외에도 귀화는 했으나 여전히 모국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진 재일동포 프로야구 선수들은 많다.
현재 해설자인 가네무라 요시아끼(金村義明·61)는 신인 1위로 킨테츠 버팔로즈에 뽑혔다. 17년 동안 프로로 뛰면서 ‘김의명’이란 이름을 그대로 썼다. 한국인의 자부심은 여전히 대단하다. ‘재일혼’이란 책을 낼 정도.
그는 고교시절 투수. 1981년 갑자원 대회 결승까지 6시합 전부 완투승을 거뒀다. 지금까지 그 기록을 깬 선수는 없다. 4번 타자로 뛰면서 타율 0.544. 당시 한국인 3세임을 스스로 밝혔다. 결승에 오른 두 학교 주전 18명 중 7명이 한국인. 그 대회가 “한국인 잔치”였다는 얘기는 교포사회 오랜 신화다. 올해 교토 국제고의 우승은 그 역사를 이은 것이다.
그해 김의명은 한일친선 고교야구에 일본 대표로 서울에 왔다. 가족과 함께였다. 모두 북한 국적이라 비자를 받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김의명의 아버지는 어릴 때 헤어진 여동생을 2명을 정부 주선으로 만났다. 아버지는 통곡했다. “그런 환대에 한국의 인상이 바뀌었다”며 일본으로 돌아가 가족 모두 한국 국적으로 바꿨다.
김의명의 집안은 어려웠다. 어머니가 골프 캐디도 했다. 김의명은 “어머니는 ‘조선인 주제에’라는 말을 들으며 차별받는 삶을 살아오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선인이니까 절대 지면 안 돼. 야구든 시험이든 아슬아슬하게 걸쳐서는 안 돼.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곳까지 가야 해. 조선인이라고 주눅 들 필요 없어. 조선인은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조선인이야’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다닌 아이였다.”
모리모토 희철(森本稀哲·43)은 현재 일본햄 파이터스의 수비주루 코치. 17년간 프로선수로 3년 연속 골든 글로버 상을 받았다. 일본 고교선발에 뽑혔으나 부모의 강한 반대로 귀화하지 않아 탈락했다. 이 씨인 그는 한국이름 ‘희철’을 프로선수 때도 그대로 썼다. 여전히 한국의 뿌리를 강조하는 발언과 행동을 하고 있다.
재일동포들 삶 속에는 모국의 우리들이 알기 어려운 온갖 힘들고 고생스러움이 다 녹아있다. 그 가운데는 일본의 차별·멸시에 못지않은 모국의 차가움도 크게 자리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늘 가슴에 고국을 품고 산다. 일본 이름을 쓴다고, 귀화를 했다고 그들을 밀어내서는 안 된다. 한껏 끌어안아야 한다. 그들도 영원한 한민족이다.
손태규 객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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