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빠빠라기 |저자: 투이아비·에리히 쇼이어만 |역자: 강무성 |열린책들
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여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북에디터 한성수]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책을 고르는 기준은 하나다. 웃기거나 울리거나.
간혹 웃다가 울컥하게 되는, 소위 ‘웃픈’ 책을 운명처럼 만날 때가 있다. 몇 안 되는 내 인생 책이 그렇다.
그래서 20대에 처음 만난 <빠빠라기> 다시 마주하기란 좀 무서웠다. 살다 보니 화만 늘어 엔간한 일엔 웃지도 울지도 않는데, 괜히 잘못 꺼내 들었다가 자괴감에 빠질까 싶어서다. ‘내게도 책 한 권에 감동받는 순수한 시절이 있었지’ 하고 자조하며 살기엔 남은 날이 너무 많다. 재수 없으면 130살까지 산다지 않나.
괜한 기우였는지 원고 마감을 이틀 앞두고 몇 장 넘겼을 때 소감은 ‘다행이다’였다. 남은 쪽수가 읽은 쪽수보다 적어질 즈음부터는 다시 읽길 잘했다 싶었다.
<빠빠라기>는 부제 하나로 설명이 끝난다. ‘처음으로 문명을 본 남태평양 티아베아 섬마을 추장 투이아비의 연설집’.
원주민 말로 ‘빠빠라기(Papalagi)’는 ‘하늘을 찢고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바다와 하늘이 분간되지 않는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갑자기 흰 돛을 단 배가 나타났는데, 원주민 눈엔 그게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였단다. 빠빠라기는 그렇게 원주민이 문명 세계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됐다.
호기심 많고 영민한 청년 투이아비는 선교사를 따라 빠빠라기가 사는 유럽 문명국가를 방문한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의 눈에 비친 문명은 경이와 찬탄이기보다 우려와 환멸이었다. 그 문명이 얼마나 인간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절감한 그는 티아베아 섬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연설을 결심한다. 자신 조상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가 유럽의 빛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책의 공동저자 선교사 에리히 쇼이어만은 1년 넘게 마을 주민으로 살며 투이아비와 속내를 나누는 친구가 됐다. 그에게 연설용으로 쓴 기록을 번역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출판에 이른다.
서문에서 쇼이어만은 ‘그의 양해나 승낙 없이, 오히려 그의 의사를 거스르면서 굳이 이 연설문을 유럽 독자에게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힌다. 잘하셨습니다. 쇼이어만 선생님!
200쪽에 걸친 연설문 내용을 내 멋대로 해석하면 이렇다. 쟤들 진짜 이상해. 왜 저러고 사는지 모르겠는데, 멋도 모르고 쟤들이랑 어울리면 우리도 평생 괴롭게 살다 죽을지 몰라. 상종도 하지 말자.
책 곳곳에 밑줄 그을 만한 구절이 많은데, 그의 언어로 연설 전반이 함축된 부분을 소개한다.
‘그들의 물건, 마구잡이 만들어 내 많기만 하고, 번쩍번쩍 번쩍이고, 반짝반짝 반짝이며, 시종 눈길을 꼬드겨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애쓰고 있는 그들의 물건. 그것들은 빠빠라기의 몸뚱이를 아름답게 한 적도, 그 눈을 밝게 한 적도, 그 마음을 튼튼하게 한 적도 없다. 빠빠라기의 물건은 우리들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빠빠라기의 말도, 그들이 우리들에게 강요하려는 ‘일’이라는 것도, 모두가 나쁜 마음의 흉계이며, 독을 품고 있는 생각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저자를 투이아비와 에리히 쇼이어만 두 사람으로 명명한 건 개인적 의견이다. ‘돈’, ‘옷’, ‘시간’ 등 문명이 만든 단어 따위는 애당초 찾아볼 수 없는 원시 언어를 현대어로 옮기는 건 재창작의 영역이니.
|북에디터 한성수. 내가 왜 이 일을 택했나 반평생 후회 속에 살았지만, 그래도 어느 동네서점이라도 발견하면 홀린 듯 들어가 종이 냄새 맡으며 좋다고 웃는 책쟁이.
북에디터 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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