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
[시조시인·여행작가 신양란] 여행에 관한 두 가지 명언을 꼽으라면, 나는 ‘아는 만큼 보인다’와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를 망설이지 않고 꼽겠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에 여행 전에 이리저리 정보를 찾아볼 필요가 있고,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기 때문에 가급적 기억이 생생할 때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해두는 게 좋다. 요즘은 핸드폰으로도 충분히 사진과 동영상을 찍을 수 있고, 블로그나 유튜브 같은 다양한 매체에 여행 기록을 저장할 수 있으니 좀 좋은가.
우리 부부는 2019년에 일본 미야자키와 도야마를 다녀왔다. 비슷한 시기에 다녀왔으니 비슷하게 기억하는 게 맞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미야자키는 찍은 사진을 장소별로 분류해 정리해 두었으므로 사진을 보면 대강이나마 기억나는 데 비해, 도야마는 사진도 별로 없는 데다가 한 폴더에 몰아두었으므로 어디에서 찍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도야마는 다녀온 건 분명하지만 기억나는 게 거의 없는 ‘깜깜이 추억’이 되어 버렸다.
오늘은 미야자키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풀어 그 여행에 대한 기억을 좀 더 확고히 해두고자 한다.
미야자키는 저비용 항공사 프로모션 특가로 다녀왔다. 제주도 가는 비용으로 미야자키 왕복 항공권을 살 수 있으니 안 갈 수 없었다. 4박 5일 동안 묵은 숙소는 ‘료칸(旅館)’이란 설명에 기대를 갖고 예약했는데, 가 보니 1970년대 수학여행 가서 묵었던 경포대 여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시설이었다. 진짜로 여관이었다.
그래도 시장통 중국집에서 먹은 음식도 맛있고, 돌아다니며 불쑥불쑥 들어간 식당에서 먹은 음식도 입에 잘 맞았다. 심지어 편의점 도시락도 먹을 만했다. 식도락 여행까지는 아니지만, 먹는 걸로 신경을 안 쓰니 여행 자체가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한량처럼 미야자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우리 부부는 우도신궁(鵜戸神宮)이라는 곳에 갔다. 해안 절벽을 끼고 들어서 경치가 볼 만하다는 설명을 듣고 찾아갔는데, 거기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우도신궁 앞 바닷가에 있는 거북 바위 등에는 홈이 패여 있는데, 거기에 점토 구슬을 던져 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관람객은 너도나도 기념품 가게에서 산 구슬을 던지며 소원을 비는 듯했다. 그러나 쉽게 들어갈 것 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전해지겠는가. 거북 바위 주변에는 등에 안착하지 못하고 실패한 주황색 점토 구슬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는 딱히 빌고 싶은 소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미 삼아 점토 구슬 10개를 구입해 일단 남편더러 던져 보라고 권했다. 남자는 왼손으로 던지는 거라고 하기에 구슬 하나를 남편의 왼손에 쥐어주며 “그냥 부담 없이 한번 던져 보라”고 했다.
남편은 잔뜩 귀찮은 표정으로 “여기서 왼손으로 던진 게 저 안에 들어가겠냐? 바람도 부는데” 하더니 불성실한 태도로 휙 던졌다. 그런데 어머어머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점토 구슬이 무엇에 이끌리는 것처럼 거북 바위 등에 고인 물속으로 퐁당 들어가는 게 아닌가? 홀인원이 따로 없었다.
‘와, 별것 아니구나.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의욕이 솟구쳤다. 그리하여 던지고, 던지고, 또 던졌지만 거북 바위 근처에도 가지 못했고, 열 개를 더 사서 남편에게 주고 집중해서 다시 던져보라고 했지만 그 역시 두 번은 성공하지 못했다. 동영상으로 역사적인 장면을 촬영하겠다고 잔뜩 설레발쳤지만 헛수고였다.
‘아니, 아까는 그렇게 쉽게 된 일이 왜 이제는 안 되는 거냐고?’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남편에게 구슬 던져 얻은 소원권 효력이 사라지기 전에 소원을 빌라고 독촉했지만 시큰둥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때 찍어온 사진을 보면 그 일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더 나이 먹어 다리가 떨리는 날이 오면, 우리는 여행을 포기하고 찍어둔 사진을 보며 추억을 이야기하겠지.
우리 부부 여행은 그날을 위해 붓는 적금인지도 모른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여행자의 성당 공부><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신양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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