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
[시조시인·여행작가 신양란] 몇 번의 경험만 가지고 ‘아마도 이러이러할 것이다’ 하는 단정은 매우 위험인 일이다. 그런 세상 이치를 모르진 않는데도, 때때로 그런 함정에 빠지곤 한다. 그런 탓에 죽도록 고생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나에게 유럽은 겨울에 그다지 춥지 않은 곳이었다. 퇴직 전에는 주로 겨울 방학을 이용해 여행했으므로 유럽 또한 겨울에 자주 갔다. 그때마다 유럽 겨울 날씨는 우리나라 엄동설한보다는 포근해 마치 피한을 간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1월 스페인 말라가 해변에서는 수영복 차림을 한 사람들을 보았고, 그리스 아테네 수니온곶에서는 반소매 옷을 입은 사람도 보았다. 그러니 유럽 겨울을 만만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017년 1월 초, 비엔나에 변변한 준비 없이 갔다가 죽을 고생을 했다.
겨울에는 여행 가방 싸는 일이 쉽지 않다. 옷 부피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얇은 옷을 챙기면 되고, 필요하면 숙소에서 빨아 입기도 하니 많이 챙길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겨울에는 그게 안 되니 가방이 복잡해지곤 한다.
그래서 2017년 1월에 비엔나에 갈 때는 두꺼운 겨울옷을 다 뺐다. 유럽의 겨울은 그리 춥지 않으니 얇은 옷을 겹쳐 있는 정도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엔나에 도착한 날,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역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날씨가 예상보다 훨씬 춥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때가 해질녁이었으므로 저녁때라 그런가 보다 하며 예사롭게 넘겼다.
다음 날 아침, 예술가 묘역 사진을 찍으러 중앙묘지로 가기로 했다. 그곳은 트램을 타고 가면 되는데, 호텔 근처에 트램 정류장이 있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다. 그러나 우리는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화들짝 놀라 호텔로 돌아갔다. 살을 에이는듯한 싸늘한 바람이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방으로 돌아가 여행 가방을 뒤적여봤지만 두툼한 옷은 없었다. 모자도, 장갑도 없고, 아들이 어렸을 때 쓰던 목도리 하나가 방한 장비의 전부였다. 비엔나에서 쓰다가 버릴 생각으로 쑤셔넣은 목도리였다.
할 수 없이 껴입을 수 있는 옷은 죄다 껴입은 다음 트램을 타기 위해 다시 호텔을 나섰다. 어찌어찌 트램을 기다린 끝에 타고 중앙묘지까지 갔다. 목적지인 예술가 묘역 쪽으로 가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너무 추우면 숨이 안 쉬어지고, 심장인지 허파인지가 아프다는 사실을 그때 배웠다.
일단 방한구를 사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금요일 저녁에 비엔나에 도착했기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그런 걸 살 수 있는 가게가 죄다 문이 닫혀 있었다. 기념품 가게만 여행자들을 바라며 문을 연 상태였다.
하지만 여행책 <가고 싶다, 빈>에 들어갈 사진을 보완하기 위해 간 만큼 날씨가 춥다고 호텔에 들어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남편과 목도리 하나를 교대로 돌려쓰며 비엔나를 헤매다니는데, 정말 얼어 죽을까 봐 겁이 났다.
그리고 뉴스를 통해 알았다. 하필 그때 동유럽 쪽에 한파가 닥쳐 동사자가 여럿 나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이틀을 죽기살기로 버틴 다음에 비로소 모자와 장갑, 털점퍼를 구할 수 있었다. 추위만 막아도 인생이 얼마나 행복해지는지를 뼈에 새겼다. 다시는 별스럽지도 않은 추위에 ‘얼어 죽겠다’는 말을 남발하지 않겠다고도 굳게 다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 부부는 겨울에 가방 쌀 때는 먹을 건 빼더라도 두꺼운 옷과 핫팩은 넉넉하게 챙긴다. 남의 나라에서 얼어 죽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유럽 겨울을 만만하게 보던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한파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여행자의 성당 공부><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신양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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