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
[시조시인·여행작가 신양란] 2017년 여름에 열흘 간 런던을 여행했다. 주된 목적이 영국박물관에 소장 유물 사진 촬영으로 대부분 박물관에서만 살았다. 그런데 8월 6일 아침엔 문득 다른 곳에 좀 가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기왕이면 안 가본 곳엘 가려고 마음먹고 목적지를 물색하다가 세인트 폴 성당을 선택했다. 예전에 외관만 보고 돌아섰던 게 아쉬움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찰스와 다이애너가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유명한 이 성당은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함께 런던을 대표하는 종교 건축물이 아닌가. 또 언제 런던에 올까 싶으니, 이번엔 안에 들어가서 차분히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 부부는 올드게이트 이스트 역 인근 호텔에 묵었고, 호텔 앞에서 25번 버스를 타면 세인트 폴 성당에 가는 걸 알고 있었다. 호텔에서 영국박물관으로 가려면 그 버스를 타야 하는데, 세인트 폴 성당을 경유해 지나갔다. 여러 차례 다닌 길이라 주변 풍경도 낯익어 찾아가기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늘 그랬듯이 25번 버스를 탔다. 호텔에서부터 몇 정거장만 가면 세인트 폴 성당 앞 정류장이므로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주변을 구경하면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은 뭔가 좀 이상했다. 일단 버스에서 안내 방송이 나오지 않았다. 모든 버스가 매우 친절하게 안내 방송을 내보내는데, 무슨 까닭인지 그날 아침에 우리가 탄 버스는 안내 방송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더욱 이상한 점은 버스가 원래 코스대로 가지 않는 것 같았다. 처음 타는 버스가 아니라 도로 주변 건물을 알아볼 만한 눈썰미는 있는데, 아무리 봐도 25번이 다니던 길이 아니었다. 남편도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마트폰을 꺼내 버스 노선 검색을 해보는데, 도무지 거리 정류장 표시와 스마트폰 속 버스 노선도가 안 맞는 게 아닌가.
그렇게 어리둥절한 채 한참을 가다 보니 멀리 세인트 폴 성당 돔 지붕이 보였다. 평소에 보던 것보다 훨씬 먼 거리라 당황스러웠다.
운전기사에게 “우리는 세인트 폴 성당에 가려고 한다”고 하자, 기사는 “오늘은 그쪽으로 안 간다. 내려서 걸어가라”라고 하였다. 기사가 내리라는데 별수 있나,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고, 세인트 폴 성당 방향을 가늠하며 무작정 걸었다.
이러구러 성당에 도착했고,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나왔다. 신자가 아니니 미사에 참여하는 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무슨 까닭에 버스 노선이 변경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누구에게 물어볼 수 없어서 그랬다.
세인트 폴 성당을 나와 엘러펀트 & 캐슬 역 근처에 있는 중국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은 다음, 타워 브리지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런데 길가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축제 퍼레이드가 지나가나 하여 목을 빼고 보았더니, 마라톤 대회가 진행 중이었다. 선두 그룹은 이미 통과한 뒤인지, 잔뜩 지친 모습을 한 몇몇 주자가 힘겨운 표정으로 달리고 있었다.
언뜻 머릿속으로 ‘아, 오늘 마라톤 대회가 있어서 도로를 통제한 모양이구나. 그래서 아침에 버스가 다른 길로 갔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호텔에서 뉴스를 검색해 보니 런던에서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있고, 우사인 볼트가 100m 대회에서 3위를 하고 은퇴 선언했다고 했다. 그걸 보면서 내가 마치 역사적 순간을 목격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 우사인 볼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엉뚱한 길로 달리는 25번 버스 안에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도로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후미 그룹 주자에게 보내던 응원의 박수도.
여행하다가 그런 특별한 현장을 목격하는 것도 소중한 추억이 된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여행자의 성당 공부><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여행작가 신양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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