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인배의 두근두근 시네마]
"이것이 월터 블랙의 모습이다. 가망이 없는 우울증에 빠진 사내, 성공적인 회사를 경영하던 그 사내는 사라져버렸다. 월터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마치 죽은 것처럼 대부분 잠을 자는 게 일이다. 부친의 자랑인 회사의 주식은 무가치한 게 돼 버렸고 한때는 성탄절 카드처럼 단란했던 가족이 이젠 끝없이 애도 중인 사람들 같다........(중략).......월터의 우울증은 뭐든 물들이는 잉크 같았고 주위를 모두 삼켜버리는 블랙홀이었다. 다들 그가 깨어나 우울증에 벗어나길 기다렸지만 그렇지 못했다. 이제 아내 메리디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작별 인사뿐이다"
긴 나레이션과 함께 우울증에 걸린 월터의 모습과 가족들의 활기 없는 일상을 스케치하듯 보여주는 오프닝으로 시작되는 영화 '비버'(THE BEAVER)는 지난 해 제 64회 칸 국제영화제, 제 33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제 58회 시드니 국제영화제, 제 16회 부산 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되어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런 만큼 '양들의 침묵'(1991)과 '피고인'(1988)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두번이나 수상하고 '꼬마 천재 테이트'(1991)와 '홈 포 더 할리데이'(1995)로 이미 감독으로도 재능을 인정받은 조디 포스터가 17년 만에 감독한 '비버(THE BEAVER)'는 '매버릭'(1994) 이후 18년 만에 멜 깁슨과 호흡을 맞춘 작품으로 그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는다.
한 때 잘 나가던 장난감 회사의 사장으로 화목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월터 블랙(멜 깁슨)은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온 우울증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폐인처럼 잠만 잔다. 정신과 치료도 받고 약물치료도 하면서 우울증을 극복해보려 노력하지만 아무 소용없다. 그런 월터의 우울증은 가족에게도 전이되어 아내 메러디스(조디 포스터)는 일중독자가 되고 큰아들 포터(안톤 옐친)는 '눈썹지압', '목 꺾기', '입술 깨물기' 같은 아버지를 닮은 자신의 습관을 기록하며 아버지를 점점 더 미워하게 된다. 더욱이 막내아들 헨리(라일리 토마스 스튜어트)는 학교에서 왕따가 되어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우울증으로 폐인이 되었던 월터가 비버가 되어 다시 가정과 직장에 충실하게 되고 그가 고안한 비버 목재공구 세트로 열풍을 일으키는 과정만으론 전형적인 헐리우드의 가족영화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그리 호락 호락하지 않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문제의 근원을 찾아 해결하면 된다"라는 메시지를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서로를 이해하면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월터와 그의 가족, 그리고 노아를 통해 각인시켜주는 것은 물론, "괜찮아, 잘될거야"라는 막연하면서도 대책없는 긍정의 힘을 부정하는 반전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다.
특히 전교생이 선망하는 학교의 여신 격인 노아 역시 오빠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상자 속에 자신을 가둔 인물로 동일한 복선을 제공하면서 이 영화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비버인형은 월터의 분열된 이중자아일 수도 있고 상자 속에 갇힌 월터의 본능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tv인터뷰에서 주장하는 월터가 아닌 비버인형의 말에서 인용된다.
체면과 의무, 타의와 자의로 인한 강압 때문에 억눌려 살지 말고 본연의 자신이 되라고 주장하는 비버의 말은 월터처럼 직접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남을 통해 듣고자 했던 노라(제니퍼 로렌스)의 졸업식 연설문에서 다시 부각된다.
"전 여러분이 속아왔던 것을 알리려고 왔습니다. 그간 부모님이나 선생님, 의사들이 거짓말을 해 왔습니다. 다들 똑같은 여섯 단어로 된 거짓말이죠. 앞으로 모두 잘 될거야."
이 영화의 극적 재미와 감동은 탄탄한 각본과 앙상블 연기, 그리고 안정적인 연출에 있다. 멜 깁슨은 우울증에 걸려 오직 손 인형 비버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월터의 심리를 중후하면서도 노련한 열연으로 보여주고 월터 블랙의 아내 메러디스의 역을 맡은 조디 포스터도 우울증에 걸린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이끌어가야 하는 고통을 섬세한 연기로 각인시켜준다.
또 반항심이 가득한 고교생 포터 블랙 역의 안톤 옐친과 '윈터스 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의 주연으로 최고의 스타덤에 오른 제니퍼 로렌스가 넘치는 에너지로 영화의 생동감을 더 해 준다. 특히 "정신적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내 안의 고통까지 치유받는 느낌이었다"고 밝힌 조디 포스터의 진솔한 연출은 잔잔하면서도 따스한 감동을 준다.
주인공인 월터가 우울증에 빠지는 확실한 동기나 문제점은 부각시키지 않고 이미 우울증이 깊어져서 별거상태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열린 오프닝과 열린 엔딩으로 월터는 현대를 사는 바로 우리들의 초상이라는 보편성을 부각시킨다. 월터가 가족들과 즐겁게 놀이기구 타는 장면으로 해피앤딩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이 영화는 결코 단정 짓지 않는다. "앞으로 모두 잘 될 거야"라는 막연한 바램과 긍정에 대한 일침으로 진정한 삶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열려진 결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이게 월터의 모습이다. 비버가 되어야했던 월터, 아빠가 되어야했던 월터, 언젠가는 바로 이것이 월터 블랙의 모습일 것이다."
<고인배 영화평론가 paulgo@paran.com>
[영화 '비버' 스틸컷. 사진 = (주)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선영 기자 sypova@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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