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NBA
[마이데일리 = 조인식 기자] 70년대 최고의 가드, 카리스마의 상징, 프로농구 최고령 감독 등 김동광 감독(59·서울 삼성 썬더스)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많다.
김동광 감독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다시 삼성의 감독으로 부임해 팀을 이끌고 있다. 지난 시즌 꼴찌의 수모를 겪은 팀을 맡아 김 감독은 2라운드까지 9승 9패로 5할 승률을 기록 중이다. 순위는 당당히 5위. 당초 목표라던 6강을 충분히 노릴 수 있는 성적이다.
프로 감독들 가운데서도 가장 경험이 많은 김 감독인 만큼 이야깃거리도 풍성하다. 지난 28일, 2라운드를 마치고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삼성 트레이닝 센터(STC)에서 프로-아마 최강전 준비에 여념이 없던 김 감독을 만나 그의 농구인생에 대해 들어보았다.
다음은 김동광 감독과의 일문일답.(上에서 이어짐)
- 고려대와 기업은행에서는 주장을 맡았는데, 어떻게 이끌었나?
통솔력이 좀 있었다. 리딩 가드를 하다 보니까 팀을 총괄하고 지시하게 됐다. 경기장에서 지기 싫어하는 성격,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는 성격이 있어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그랬다. 프로가 된 후에는 프로다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아마추어 때는 연차에 따라 은행 직원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고, 수당도 없었다. 기업은행에서 한 가지 대우받은 것이 있다면 대리 시험을 면제시켜준 것이다. 대리 시험을 봐야 과장, 차장으로 올라가는데, 대표선수를 하고 은행에서 오래 뛴 공으로 나와 신동파 감독만 그런 대우를 받았다. 지금은 대강대강 하는 선수들을 보면 충분히 더 많은 돈을 받을 수도 있을텐데 안타깝다.
나는 연습장에서 동기한테도 뭐라고 했다. 똑바로 하지 않으면 꼭 말을 했고, 지금 생각해도 꾀를 부린 적이 없었다. 후배들이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고참들이 안 하면서 하라고 하면 따라오지 않는다. 그게 지도자 생활에도 도움이 됐다.
- 현역 시절에 인기가 엄청났다는데 어느 정도였나?
70년대 후반에 싱싱할 땐 CF도 찍었다. 기업은행 CF도 찍었고, 홍삼 음료 광고도 했다. 그땐 좀 잘나갈 때다(웃음). 기업은행에서 신입직원들을 뽑은 뒤에 오리엔테이션 때 은행에 바라는 것이 있냐고 물으면 여직원들은 김동광 선수를 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단체로 있는 강당에 가서 인사도 하고 그랬다.
아마 우리 세대가 오빠부대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당시 장발이었는데, 체육관 밖에서 기다리다가 캔 음료를 건네주곤 했다. 나는 파워풀한 플레이를 했기 때문에 여성 팬들 뿐만 아니라 남성 팬도 많았다.
종로구에 위치한 곳에서 결혼을 했는데, 인터넷이 없는 시절이었지만 팬들이 많이 와서 결혼식장이 꽉 찼던 기억도 있다. 내가 나온 기사를 다 스크랩해서 앨범을 만들어 보내준 팬들도 있었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집에 와서 우리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간 친구들도 있었다. 중학교 때 내 팬이 됐다가 시집가서 애를 낳고 찾아온 팬도 있었다. 지금은 학생들이 와서 어머니가 싸인 받아오라고 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 은퇴 후에는 바레인 대표팀 감독을 맡았는데?
아시아 농구선수권을 뛰면 다른 나라에서 나보고 파워 있는 농구를 한다고 엔진이라고 불렀다. 그 전에 바레인 클럽팀에 한국 코치가 9명이 있었는데, 선수들이 감독으로 나를 지명했다. 현역 은퇴시기를 잡아 놓고 있었는데, 은퇴하고 바로 바레인에 들어갔다.
당시 83년에 은행 대리 월급이 30만원 할 때였는데, 거기선 2500달러를 준다고 했다. 우리 돈으로는 200만원 정도 됐을 것이다. 집도 주고, 차도 주고 한다고 하기에 은행에 휴직계를 내고 갔다. 그땐 경제가 어려워서 중동에 가서 일을 많이 했었다. 일반인들이 1600달러 수준이었는데, 2500달러였으니 파격적이었다. 현역 때 잘 해서 그 덕을 많이 봤다.
- 바레인 생활은 어땠나?
바레인은 하루에 2시간만 연습을 시킨다. 선수들도 각자 본업이 다 있었다. 나는 대표팀에 있어서 1년에 딱 4개월만 지도를 했다. 그 외에는 리그 경기를 가서 선수를 체크하고 시즌이 끝나면 선발해서 바레인에서 1달을 연습, 전지훈련을 1개월 하고 걸프 챔피언십에 나갔다. 첫 해에는 사우디한테 져서 준우승을 했다. 1년 지나서는 청소년 대표팀을 데리고 한국 전지훈련도 했다. 그때 우리 청소년 대표팀엔 허재가 있었다.
참. 부임 초기에는 대한민국 대표팀 방열 감독이 대표팀을 데리고 와서 바레인에서 경기를 한 적도 있었다. 방열 감독에게 봐주지 말고 박살을 내달라고 했다. 이충희 박수교가 뛸 땐데, 그렇게 해야 한국 농구의 위상이 올라갈 거라 생각했다. 그때 우리 팀(바레인)이 30점 차로 졌다. 부임 초기였는데, 그 게임 이후에 선수들이 내 말에 잘 따랐다.
애를 둘 데리고 나가서 2년 9개월 있었는데, 생활은 참 편했다. 아파트에도 살아보고, 차도 처음 가져봤다. 굉장히 좋은 조건이었다. 시간도 많고 더워서 밖에 나가질 못하니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집안일도 많이 도와줬다. 지금도 아내는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했다. 지금은 숙소에 있고, 10분 거리인데도 집에 잘 가지 못한다.
(下)에서 계속.
[김동광 감독. 사진 = 마이데일리 사진DB]
조인식 기자 조인식 기자 nick@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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