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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이승록 기자] 마여진(고현정)이 가르치고자 한 건 '현실'의 매서움이다. 스스로 현실의 절대 권력이 돼 아이들에게 자신이 정한 룰을 강요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차별한다. 아이들은 불평등하다고 항변하지만 마여진은 이게 현실이라고 단정한다.
"동화 같은 세상은 없기 때문이야. 너희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에선 착한 사람은 억울하고 가난할 거야. 나쁜 짓을 해도 힘이 센 사람 편이라면 벌 대신 상을 받을 거고. 어른이 되면 내가 너희들에게 한 것보다 훨씬 심한 일들과 싸워야 할 거야. 그 순간마다 선택은 너희들의 몫이야. 하지만 그 결과 역시 너희들에게 돌아올 거야. 그동안 나와 싸우며 뭘 배웠지? 사는 동안 너희들을 괴롭힐 싸움 앞에서 너희를 구원해줄 초능력이나 도깨비 방망이 따윈 현실에선 없어. 대신 한 가지, 가능한 희망이 있을 뿐이지."
▶ 현실은 누가 만들었고 아이들은 누가 가르치는가
마여진이 말한 건 정말 현실이었다. 어른들의 세계이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냉혹한 현실을 알려주고 교육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극에선 효과가 있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경쟁하고 때로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날 배신하는 지독한 현실 안에서도 스스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게 되었고 무엇이 더 가치 있는 일인지 깨달았다.
왜 마여진이 교실에다가 현실 세계를 만들어놓고 그 안으로 자신들을 몰아넣었는지 뒤늦게 그 진심을 알게 된 학생들은 마여진 앞에서 울었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그 깊이를 짐작할 수도 없는, 학교에선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 현실의 매서움을 마여진이 미리 알려주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희망 또한 마여진이 전한 교육이었다.
하나 마여진의 교육은 감동적이면서도 한편 씁쓸했다. 아이들이 미리 체험한 이 잔인한 현실은 사실 어른들이 만든 세상의 부작용 아니었던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무한경쟁과 최고만 인정 받는 줄 세우기의 연속,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나 경쟁자인 이토록 차가운 현실은 사실 어른들의 잘못이었다.
마여진의 가르침은 곧 어른들은 이 잔인한 세상을 바꾸지 못했으니 차라리 그 안에 뛰어들기 전 미리 만반의 준비를 다하자는 슬픈 외침과도 같았다. 왜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지럽혀놓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을까. 왜 어른들이 먼저 세상을 바꿔주지 않았던 건가.
그리고 MBC 드라마 '여왕의 교실'은 SBS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의 경쟁에서 졌다. 최고시청률은 '여왕의 교실'이 9% 남짓,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20%를 넘었다. 이 시청률이 의미하는 것 역시 '현실'과 '꿈'의 괴리였다.
'여왕의 교실'이 현실을 교실에, TV에, 그리고 안방에 옮겨온 드라마라면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판타지의 세계로 구축된 드라마다. 사람의 마음이 들리는 초능력을 가진 남자. 이 판타지로 출발한 세상은 살인이 반복되며 잔인하게 묘사됐음에도 모든 게 판타지란 걸 알기에 용인되었고, 덕분에 박수하(이종석)와 장혜성(이보영)의 로맨스는 더욱 극적이었다.
마여진은 왠지 현실에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현실 그 자체인 인물이고, 박수하는 왠지 현실에도 있을 것 같지만 사실 현실에는 없는 인물이다. 시청자들은 후자를 택했다. 이는 시청자들이 마여진이 말한 잔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마여진이 마치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듯 아이들에게 알려준 냉정한 현실은 결국 시청자들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이었고, 마여진이 말한 인물들은 시청자들 스스로이기도 했다.
드라마가 끝난 순간 마여진이 묘사한 현실로 돌아와야만 하는 운명. 지금의 시청자들은 마여진의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차가운 현실에 무방비로 뛰어들어 버티며 살아온 지 이미 오래였다. 숨 막히는 현실에서 지칠 대로 지쳐버린 사람들은 TV 앞에서까지 날 선 현실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게다. 차라리 박수하를 보며 '나도 누군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이란 생각을 하는 게 현실에 지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작은 피난처였을지 모르겠다. '여왕의 교실' 일본 원작에서 여주인공 아쿠츠 마야가 자주하는 말이 있다. "이제 적당히 눈뜨지 그래?" 하지만 눈뜨고 '여왕의 교실' 속 현실을 직시하는 게 현실의 시청자들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현이는 책을 읽을 때 행복하다고 하지만 오동구는 곤충하고 놀 때 행복하다고 하고요. 보미는 만화를 그릴 때 행복하다고 하지만 저는 보미가 만화를 그려줬을 때 행복했거든요. 행복은 딱 정해진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친구들이 다 다르듯이 친구들마다 행복도 다 다르니까요. 그러니까 스물다섯 명이 있는 우리 반에는 스물다섯 개의 다른 행복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 거라면 전 우리 반 스물다섯 명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하나라면 아마도 '여왕의 교실'을 본 9%나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본 20% 이상이나 그 순간 행복했다면, 그것이 현실을 본 것이든 판타지를 본 것이든 아무 상관없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치힛!" 하며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MBC 드라마 '여왕의 교실'의 배우 고현정(첫 번째)과 김향기(세 번째), SBS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배우 이종석(가운데). 사진 = MBC-SBS 방송 화면 캡처]
이승록 기자 roku@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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