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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이승록 기자] 고등학생 때의 어느 날, 시간이나 보내자는 생각에 기대 없이 들어선 작은 공연장은 어린 관객들로 채워져 있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진 건 뮤지컬 '라이온 킹'. 그리고 서하준의 인생이 뒤바뀌던 순간이었다.
"웅장했어요. 작은 공연장이었는데, 저에겐 너무나 웅장하게 다가왔어요. 보는 내내 시선을 뗄 수 없었어요. 화려한 조명, 역동적인 움직임, '저걸 어떻게 표현한 거지? 영화에서만 가능할 것만 같았는데…' 그런데 커튼콜 때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대체 저게 어떤 감정인 건지 궁금했어요."
연기가 주는 희열과 감동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서하준의 발을 이끌었고 이틀 뒤 연기학원을 등록해 처음 연기란 걸 배웠다. 중학생 때까지 육상과 럭비 같은 운동에 더 소질을 보였던 서하준이었다. 운동 역시 찬성하지 않던 그의 어머니는 연기를 한다고 했을 때도 마음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만 서하준은 "제가 그렇게 갈망하면서 무언가 했던 건 연기가 처음이었어요"라고 했다. 그래서 훗날 그의 어머니는 서하준에게 "네가 연기에 빠져들어서 뭔가 하려는 모습이 내 마음을 열었단다"고 했다.
이후 처음 무대에 선 건 2008년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 반항아에 부적응자이지만 스승을 만나 마음의 치유를 얻는 인물이 맡은 역할이었다. 그 뒤 몇 작품 더 무대에 섰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조건이 그의 한계를 만들었고 집안까지 어려워지자 현실의 벽에 크게 부딪혔다.
그렇게 배움과 혼란이 그를 흔들던 시기, 이상한 일이 서하준에게 벌어졌다.
서하준의 페이스북으로 날아온 쪽지 하나. 홍콩이었다. 페이스북으로 사진을 보았다며 전화번호를 알려주면 연락하겠단 한 모델 에이전시였다. 당연히 믿지 않았다. 보이스피싱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쪽지가 계속 왔다. '뭐지?' 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번호를 남겼고, 정말 홍콩에서 연락이 왔다. 영어가 유창한 친구까지 불러 통화한 후 들은 결론은, 함께 일하고 싶으니 홍콩으로 데려가겠단 거였다. '왜 날?' 하는 불신은 당연했다.
"원하면 와서 데려가라고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건방진 말이었을 거예요. 그때는 정말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진짜 홍콩에서 관계자들이 회사 자료를 들고 한국에 왔고, 알고 보니 유명 배우들이 소속된 대형 에이전시였다. "'도전해 볼까? 그래, 뭐든 경험하자' 하는 마음으로 떠났어요. 연기를 위해선 무엇보다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홍콩에서 경험한 세계는 밝지 않았다. "홍콩에 있던 건 3개월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제겐 3년 같은 긴 시간이었어요."
여러 광고에 출연하고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해봤지만 정작 한국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마음 기댈 곳이 없었다. 다른 모델들처럼 키나 외모가 출중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집안은 더욱 힘들어졌다. 어머니는 건강이 안 좋아졌고, 그가 삶의 원동력으로 여겼던 외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집을 떠나 있는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올려다보니 이미 부딪혔던 현실의 벽은 더욱 높아져 있었다. 무거운 감정이 서하준을 잠식했다. 신년 연휴 5일은 고독의 절정이었다. 고시원 같은 좁은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곁에 둔 건 라면과 우유, 시리얼뿐이었다. '이게 맞는 걸까? 연기의 꿈을 접고 돈을 버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생각만 하염없이 반복했다.
고독한 방 안을 유일하게 울리는 건 구석의 작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영화 채널 소리. 그리고 늘 그렇듯 시선을 물끄러미 그 작은 TV에 고정하고 있던 날이었다. 어두운 마음과 다르게 서하준의 눈과 입이 움직였다. TV 속 영화배우의 표정을 흉내 내는 거였다.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따라 하게 되는 영화배우의 표정.
작은 공연장 위 '라이온 킹'이 웅장하게 다가왔던 것처럼, 화려한 홍콩 속 홀로 어두운 방의 작은 TV에서 흐르는 배우들의 연기가 서하준의 심장을 세차게 두드렸다. '아, 연기가 다시 하고 싶어.'
홍콩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큰 성과는 없었으나 그 시간은 서하준을 단단하게 했으며 움츠렸던 연기 열정을 깨웠다.
그러다가 회사로 온 연락. 매니저 설설희 역할로 투입된다는 소식이었다. "작은 역할로 알고 들어갔어요. 여주인공 오로라를 보좌하는 역할. 처음에 대본도 딱 한 회분만 주어져서 아무 정보도 모르고 그 대본 안에 주어진 요소들로만 연기를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다음 회 대본이 나오면 나올수록 분량이 많아졌어요."
사실 '오로라 공주' 속 설설희는 재벌집 아들이었다. 신분을 숨긴 채 오로라에 대한 마음을 키웠고, 오로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뒤에서 묵묵히 도운 '백마 탄 왕자'였다. 같은 얼굴의 전혀 다른 환경을 연기해야 했기에, 또 서하준 역시 그 비밀을 미리 알지 못했기에 연기와 표현에 혼란이 있었다. 그런 그를 도운 건 전소민, 오창석, 임혁, 김영란 등의 선배들 그리고 임성한 작가였다. 임 작가는 종종 서하준에게 전화를 걸어 연기 지도를 했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있을 때 연락을 주세요. 초반에는 제가 매니저 설설희만 생각하고 재벌 설설희는 생각하지 못한 채 표정 연기를 자유롭게 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작가님이 연락하시더니 '매니저를 연기할 때도 밝은 캐릭터로 하되 진중함까지 같이 가져가라. 표정에서 절대 가벼움이 드러나선 안 된다. 재벌 설설희가 가진 캐릭터도 버리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칭찬은 없었다는데, 오히려 서하준은 더 고마워했다. "칭찬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전 그게 더 편하더라고요.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었어요. 저도 작가님 얘기만 듣고 오디션 때 뵌 건데, 사실 오디션 끝나고서야 임성한 작가님인 줄 알았거든요. 주위에선 무섭고 신비할 것 같단 얘기들을 하지만 그런 이미지와는 멀어요. 전화가 처음 딱 왔을 때 제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꼼꼼히 잡아주는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선생님 같은 분이셨어요. 마치 바로 제 옆에서 연기를 코치해주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저도 몰라요. 아직 아무런 정보도 없어요. 대본이 급박하게 나오는 상황이라 지금까지 나온 대본에도 그런 암시가 되는 부분도 없어요. 혹시 하차하면 시청자들이 아쉬워하지 않겠냐고요? 글쎄요. 저는 만약 제가 빠져서 드라마에 도움이 된다면 그게 맞는 답이란 생각도 들어요. 조연의 역할이 주연을 빛내주는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주연을 빛내주고 하차를 해서 드라마에 좋은 영향을 줄 수만 있다면 그럼 하차해도 맞는 길이란 생각이에요."
오로라가 설설희의 긍정적인 마음과 개구쟁이 같이 천진한 눈빛에 그가 재벌집 아들일 거란 생각을 못했기에 서하준의 거짓 없는 정직한 눈빛, 따듯한 목소리를 듣고 보면서도 혹시 서하준의 또 다른 얼굴은 엄청나게 놀라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얼굴은 아마도 이제 막 시작해 앞으로 펼쳐질 서하준의 연기 인생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서하준도 소속사 스태프들에게 크게 혼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요즘 사인도 많이 하죠?"라고 묻자 들려준 얘기였다.
"아유, 안 그래도 사인 때문에 많이 혼났어요. 촬영하고 있으면 여러 분들이 구경하러 오시는데, 그 중에 알아봐주시는 한, 두 분이 사인해 달라고 오세요. 그런데 전 사인 같은 건 생각도 못했고, 만들어 놓은 것도 없었거든요. 막상 그런 요청을 받으니까 난감하더라고요. 그래서 제 이름 세 글자를 딱 써드렸죠. 스태프들한테 혼났어요. '그건 예의가 아니다'라고요. 지금요? 빨리 만들어야 되는데, 음… 일단 이름 세 글자 사이를 연결하는 선들은 넣었어요. 하하."
(서하준의 이상형, 결혼에 대한 생각 등은 인터뷰②에서 계속)
[배우 서하준. 사진 = 봄엔터테인먼트 제공-MBC 방송 화면 캡처]
이승록 기자 roku@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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