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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이승록 기자] '모델돌'이란 말, 아이러니하지 않나 싶었다.
모델 출신이 모여 노래를 한다니, 사실 대중의 기대감을 비트는 수식이다. 모델 같은 긴 팔다리와 날씬한 몸매를 기대하는 게 대중이 가수에게 요구할 수 있는 적합한 기대인가. 나인뮤지스는 2010년 데뷔해 '모델돌'로 어필했고, 실제 이들의 무대는 모델들의 패션쇼 같았다. 대중의 반응 역시 냉담했다.
그리고 데뷔 4년 차인 이들이 최근 첫 정규앨범을 냈다. 물론 그 사이에 싱글과 미니앨범을 내긴 했다. 그래도 이번 앨범은 11곡이나 들어있어 지난 앨범들과 구분 지어 첫 정규앨범이라 붙일 만큼 묵직하다. 다만 왜 4년 차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규 '1집'인지가 궁금했다. 예전에 발표한 노래들을 여기저기 끼워 넣은 것도 아니라 11곡 모두 신곡으로 채운 걸 보면 뚝딱하고 만들어낸 정규 앨범은 아닌데 말이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이런저런 자료들을 찾아봤다. '모델돌'의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던 나인뮤지스였던 터라 이들의 다른 모습은 어떤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솔직히, 조금 찡했다. 무대 밖 나인뮤지스의 모습이 담긴 영상들 대부분에는 이들이 눈물 흘리는 장면이 담겨있는 거였다. 그것도 자신들의 화려한 이미지를 따르는 팬들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지난 3월 노래 '돌스' 활동을 마무리하던 날. 나인뮤지스는 방송국 한 편에서 팬들을 만났다. 팬미팅이라고 거창하게 말하기엔 조금은 머쓱한 조촐한 만남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으나 나인뮤지스는 울었다. 그 중 멤버 현아는 팬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며 울었다.
"사실 나인뮤지스를 좋아한다고 표면적으로 얘기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팬 입장으로서…"
참으로 슬픈 고백이지 않나. 자신들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떳떳하지 못했을 거란 걱정.
자료를 찾을수록 나인뮤지스, 유난히 부침이 심했던 걸그룹이었다. 멤버 탈퇴와 영입을 반복하며 비로소 안정적인 구성이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그룹들이 갈등과 반목을 감췄다면 나인뮤지스는 그 상처가 오래도록 다 드러나 있더라. 지금은 어떠할까, 여전히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시련에 지쳐있진 않을까 궁금했고 한편 걱정되기도 했다.
다행히 직접 만난 나인뮤지스 아홉 멤버들 꽤 밝았다. 또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
이유애린은 예쁘장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과격한 장난을 좋아했고, 막내인 민하와 혜미는 언니들에게 이따금 애교 섞인 말투로 투정 부렸으며 언니들은 이런 막내들을 놀려댔다. 경리가 악플러 얘기를 하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자 이유애린은 붉어진 경리의 얼굴을 보며 웃었으며, 이샘은 차분한 목소리로 조리 있게 자신의 생각을 전할 줄 알았다. 은지는 멍한 표정을 잘 지었고, 성아가 자신의 연애관을 얘기하자 다른 멤버들은 "말도 안 돼"라며 발끈했으며, 현아가 이번 앨범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는 세 곡 정도 된다며 하나 둘 늘어놓다 세 곡이 넘어가자 이때다 싶어 멤버들이 "세 곡이라며!" 하고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오랜 기간 나인뮤지스의 우여곡절을 함께해온 세라는 흐뭇한 눈빛으로 다른 멤버들의 장난을 바라봤다.
세라는 데뷔 4년 차에 낸 첫 정규앨범을 두고 "누군가에게 '이게 우리의 음악입니다' 하면서 나인뮤지스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는 아이템이 생겨 기뻐요"라고 했다. 이샘은 "연습생 때 생각도 나고, 데뷔 후에도 마음고생 많이 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들고 슬럼프도 왔었는데, 지나온 과정들이 자꾸 생각나는 시기예요. '아, 고생했는데 드디어 정규앨범을 내는구나'"라고 했다.
나인뮤지스는 자신들의 데뷔 초를 "더 내려갈 바닥도 없었다"고 돌아봤고, "안무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고, 힘들고 부끄럽기도 했어요"라고 한 멤버도 있었다. 다만 음악방송에서 가수가 아닌 모델처럼 걸었던, 그래서 무대에 서는 게 자신 없던 그 시기에 이들은 "더 내려갈 데가 없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들을 갈라놓으려는 시련이 강했던 만큼, 어떻게든 떨어지지 않으려고 서로를 부여잡은 손에는 더 큰 힘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래서 '건'을 노래하는 지금을 "정말 재미있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는 건 이런 거구나 싶어요"라고 생각한단다.
"제가 '레이디스' 활동 때부터 합류해 멤버들의 우여곡절을 봐왔고, 정말 괜찮은 친구들인데, 인터넷에 나인뮤지스를 치면 그런 글들이 있었어요. '나인뮤지스 좋아한다고 하면 쪽팔려'. 저희를 성적으로 비하하는 글들도 있었고요. 그날, 그런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 것 같아요. '돌스' 때 저희를 사랑해주는 팬들이 갑자기 많이 늘었는데, 사실 그런 상상을 한번도 못해봤거든요. 단지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주변의 반응은 신경 쓰지 말고 내 일이나 하자'란 생각이었어요. 근데 마음 속에 쌓이고 있었나 봐요. 팬들 앞에서 그 얘기를 하는데, 눈물이 터지더라고요."
그 눈물의 고백을 보는 팬들의 마음이라고 편했으랴. 지금도 팬들이 나인뮤지스의 팬이란 게 떳떳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현아는 "저희가 떳떳하게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한다. 이러니 나인뮤지스의 지나온 세월을 아는 팬이라면 그 누가 떠날 수 있겠는가.
혜미는 나인뮤지스로 활동하며 어느 순간이 가장 행복했었는지 묻는 질문에 어느 날 행사를 마치고 멤버들과 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때 느꼈던 풍경을 끄집어냈다. "저희의 이번 '프리마 돈나' 앨범 전곡을 차 안에서 듣게 됐어요. 새벽에요. 뭔가 묘하면서 행복했어요"라고 했고, 무슨 까닭이었냐고 재차 묻자 "감격스러웠어요. 이 11곡을 준비하기 위해 저희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시련을 견뎌왔었는지 그 과정이 떠올랐거든요. 그래서 9명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다 행복했어요"라고 했다.
세라는 같은 질문에 "요즘이 가장 행복해요"라고 했다. "멤버들 모두 욕심을 버리고 9분의 1씩만 바라고 있어요. 그리고 요즘은 무대에서 가끔 멤버들 눈을 마주치면 가서 안아버리고 싶고 엉덩이도 때리고 싶고 그래요. 지금 제게는 얘네 밖에 없어요. 세상도, 가요계도 제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이렇게 9명이에요."
나인뮤지스의 정규 1집 '프리마 돈나'에는 총 11곡이 실렸다. 타이틀곡 '건'은 스윗튠이 작곡한 노래로 기존의 강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여성적인 매력을 강조했다. 가사는 적극적으로 다가오라는 이성을 향한 재촉의 이미지를 풍기는데, 성아는 "직설적으로 '돌직구'를 던지는 곡"이라고 했다. 지금의 나인뮤지스를 완성하는 데 큰 영향력을 끼친 작곡가팀 스윗튠에 대해선 이샘이 "없어질 위기의 우리에게 심폐소생술 같았던 존재"라고 했고, 경리는 "예전부터 함께 작업해보고 싶었기에 소원을 이뤘다"고 했으며, 이유애린은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지금은 가족 같다. 우리 개개인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안다"며 "몰라요, 몰라. 사랑해요 스윗튠"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이번 앨범은 나인뮤지스의 노래를 '모델돌'이란 울타리를 거두고 감상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고 흥미롭다.
데뷔 4년 차에 낸 첫 정규앨범, 의아했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 알아보고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눠보니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2010년 데뷔 후 이제서야 비로소 이들이 하나가 되었던 거라고 믿는다. 진정한 하나의 나인뮤지스로서 낸 첫 앨범. 그리고 진정한 아홉 명의 한 그룹으로서 첫 걸음을 뗀 이들의 이번 활동 목표는 "솔직히 1위까지는 생각 안 해봤어요. 1위보다는 항상 즐겁게 보여드리자는 거예요. '나인뮤지스는 이런 가수다' 하고 보여드리는 첫 앨범이에요. 거기에 의미를 둘 거예요"였다.
[걸그룹 나인뮤지스의 세라, 이샘, 은지, 성아, 경리, 현아, 혜미, 이유애린, 민하(첫 번째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사진 = 스타제공 제공]
이승록 기자 roku@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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