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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김나라 기자] 한국 도박 영화의 계보에서 본 적 없던 소재를 다룬 작품이 등장했다. 바로 신예 최국희 감독의 도박 볼링 세계를 그린 영화 '스플릿'. 총 제작비 53억 원이 투입된 중예산의 작품이다. 볼링 국가대표 선수에서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한 철종(유지태)과 자폐아 볼링 천재 영훈(이다윗)의 짜릿한 뒤집기 한 판을 담았다.
최국희 감독은 극 중 "한 번만 더 치면 스트라이크를 날릴 것 같아서 볼링에 미치는 거다"라는 백사장(권해효)의 대사처럼 단편 영화 연출부터 홍상수 감독의 연출부를 거쳐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계속해서 볼을 던진 끝에 '스플릿'으로 상업영화 데뷔를 치르는 스트라이크를 맛봤다.
그는 첫 장편영화 '스플릿'의 연출을 맡음과 동시에 시나리오도 직접 썼다. 일상에서 우연히 겪었던 영화 같은 에피소드가 그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지난 2014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던 것으로 기억해요. 에어컨이 빵빵한 집 근처 시립 체육관으로 피서를 갔는데 그곳에서 독특한 포즈로 볼링을 치고 있는 한 아저씨를 봤어요. 정말 엉성한 폼으로 치는데도 스트라이크를 내고 실력이 대단하셨어요. 그러고 나서는 빈 의자를 향해 하이파이브를 날리더라고요. 이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아 펜을 잡게 됐죠."
이 남성의 정체는 인근에 위치한 특수학교 출신의 자폐증을 앓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스플릿'의 자폐아 볼링 천재 영훈 캐릭터가 탄생됐다. 영훈 같은 사람이 있다면 분명 현실 세계에선 그 능력을 이용하려는 철종 역할이 있을 것이고 생각이 꼬리를 물어 도박판까지 뻗었다.
"물론, 볼링 천재를 양지의 스포츠 세계로 데리고 갈 수도 있죠. 하지만 성장하고 우승하고 끝나는 게 너무 뻔하잖아요. 도박이라는 설정도 그동안 전혀 다뤄지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식상함이 덜할 거 같아 어둠 속으로 끌고 갔어요. 그리고 자료 조사를 하다가 접한 단편 소설에서 '삼류인생 선수'라는 짤막한 글을 보고 영감을 얻기도 했고요."
현재는 사라진 추세이지만 실제 국내에서 1970~80년대 도박 볼링이 성행했다고 한다. 경기 장면은 최국희 감독의 디테일한 설정이 더해져 드라마틱하게 각색됐다.
"영화적 재미를 살리기 위해 볼링 장소에 따라 도박꾼들의 관전 풍경을 달리했어요. 신식 볼링장에선 고급스럽게 와인을 마시면서, 허름한 곳에서 경기가 이뤄질 때는 볼링장 바닥에 주저앉아 술을 들이켜 보는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사운드에 집중했어요. 많은 분들이 볼링을 치는 이유가 그 통쾌한 소리 때문이기도 하잖아요. 그동안 볼링 영화가 없었기 때문에 이 스포츠만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최국희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이 감탄을 자아낸다면 유지태, 이다윗, 이정현, 정성화 등의 연기력은 감동 그 자체다. 밑바닥 인생을 연기한 유지태부터 자폐아 캐릭터를 소화한 이다윗, 악역 정성화 등 모두 환상의 앙상블을 이뤄 두말할 것 없이 완벽했다.
특히 이다윗은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 남다른 존재감을 발휘, 개봉 이후 관객들의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다윗이는 영리한 친구예요. 프로 배우라고 생각해요. 주변에서도 칭찬을 많이 하더라고요. 영훈 캐릭터는 잘못 다루면 불편하게 느끼실 수 있는 역할이라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함께 노력을 많이 했어요. 영훈이 자폐 증상을 앓고 있는 설정이긴 하지만 중증 환자는 아니라서 그 선을 정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실제 자폐 센터에서 근무하셨던 정신과 원장님께 자문을 얻어 오버스럽지 않게 그려낼 수 있었죠. 다윗이가 걱정을 많이 했는데 잘 소화해줬어요."
유지태와는 동갑내기이긴 하지만 그는 18년 연기 경력에 빛나는 배우이자 감독도 겸하고 있다. 신인 감독으로서 부담이 되진 않았을까.
"첫 촬영날 유지태 씨가 먼저 얘기를 하더라고요. 연출하러 온 게 아니라고요. 하하. 당연히 월권 같은 건 전혀 없었답니다. 오히려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경험이 많으시니까 말하지 않아도 미리 척 알아서 해주셨어요. 유지태 씨에겐 무척 감사드려요. 그리고 유지태 씨의 애드리브 덕분에 명장면도 많이 탄생됐어요."
그렇다. 극 말미 "스페어 처리하러 가야지"라는 명대사는 유지태의 애드리브였다. 이외에도 '스플릿' 곳곳엔 배우들의 애드리브가 담겨져 있다. 이는 최국희 감독이 일부러 '컷' 사인을 늦게 해 자연스럽게 유도한 덕분이었다.
"저는 제가 주로 시나리오를 직접 쓰면서도 대본은 가이드라인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연기는 배우가 하는 거니까 현장에서 주고받은 호흡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사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고 해요. 가이드라인을 해치지 않은 선에서 말이에요."
이러니 '스플릿'을 본 뒤 이 여운을 달래러 볼링장을 안 가고는 못 배길 터다. 최국희 감독이 충무로에서 퍼펙트게임을 기록할 날도 머지않았음을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시국이 워낙 좋지 않은 상황인데 '스플릿'을 감상하시고 통쾌함과 따뜻함을 느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사진 = 송일섭기자 andlyu@mydaily.co.kr]
김나라 기자 kimcountry@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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