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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이예은 기자] "앞뒤 안 보고 들이댔어요. 안 왔으면 평생 후회했을 거예요." 정진영(57)이 배우가 아닌, 영화 '사라진 시간'의 연출자로 관객들과 만난다.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사라진 시간'(감독 정진영)으로 감독에 데뷔한 배우 정진영과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사라진 시간'은 의문의 화재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형구(조진웅)가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신선한 설정,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말까지 모든 게 기묘하다. 그럼에도 긴장감이 넘쳐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장르도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코미디, 미스터리, 판타지, 연 등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색다른 흥미를 자아낸다. 궁극적으로 삶이란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사유하게 만드는 게 영화의 목표. 낯익으면서도 파격적인 이 작품은 배우 정진영의 손에서 탄생했다.
33년 간 연극, 영화, 드라마 등 다방면에서 활약해온 정진영은 관록의 연기파로 인정받는 대한민국 대표 배우다. 연기 면에서 최정상에 위치한 그이지만 젊은 시절부터 꾼 꿈을 이루기 위해 '신인' 감독이 됐다. 4년 전부터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하고 편집했다. 배우 조진웅, 배수빈, 정해균, 차수연, 이선빈, 신동미, 장원영 등은 정진영의 도전에 기꺼이 함께 했다.
기자들과 만난 정진영은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이럴 줄은 몰랐다. 작년에 후반 작업을 다 끝냈다. 이준익 감독이 '개봉 앞두면 미칠 걸?'이라고 하시더라. 그 분은 베테랑이고 거장이신데 여전히 그러신다더라. 그런데 진짜 제가 경험하니까 발가벗겨진 느낌이다. 배우도 평가를 받는 자리이지만 자신의 캐릭터와 연기를 평가 받는 거다. 이건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만든 이야기다. 솜씨가 아니라 제 전체가 벗겨진 느낌이다. 이상하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연출이 꿈이었지만 긴 시간 배우로 살았다. 연출할 능력이 안 된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그래서 도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4년 전부터 용기를 냈다. 만들었다가 망신을 당하면 어떡하나 싶은 두려움이 있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해보자는 마음, 그래야 내가 행복하지 않을까 싶은 단순한 마음이 있었다"며 "지금은 숨을 데가 없다. 어떤 분은 영화를 보면서 제 내면을 읽으려고 하실 것 같다. 하지만 제가 빼어난 연출 실력을 가져서 시작한 게 아니다. 진심으로 투박하게 다가가자는 것이었다. 또 다른 영역이다"고 말했다.
"그래도 굉장히 행복했어요. 낑낑대다가 풀리는 순간 오는 쾌감들이 있었고요. 촬영장에서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좋았어요. 한번도 해보지 않은 후반 작업은 배우면서 했습니다. 다만 배우로서 개봉을 경험했지만 감독으로서의 개봉은 굉장히 달라요. 끝나 봐야 이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될 것 같아요."
두려움에 쉽사리 발을 내딛지 못했던 정진영을 결심하게 한 건 배우 겸 싱어송라이터 김창완이었다. 정진영은 "드라마 '화려한 유혹'을 통해 김창완 선배를 만났다. 저는 당연히 선배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하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타를 대학교 때 배웠다고 하시더라. 어떻게 음악을 하실 수 있냐고 물었더니 '젊었을 때 비틀즈든 뭐든 아무것도 안 들어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음악을 해'라고 하시더라. 너무 놀랐고 약도 올랐다. 제가 주저하고 망설였던 이유가, 체계적인 연출 학습이 안 됐었기 때문이다. 과거 이창동 감독님 작품에서 연출부 막내로 했지만 막내가 뭘 알겠나. 김창완 선배님 말을 듣고, 학습 이전에 그냥 자신이 느끼는 무언가로 만든다면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겠다는 걸 알았다"라며 "어떤 평을 받더라도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스타일로 가보자고 했다"고 밝혔다.
마침내 베일을 벗은 '사라진 시간'은 단순 미스터리 스릴러물이라는 예상을 뒤엎었다. 기존 문법을 벗어난 연출, 스토리 전개 방식은 정진영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엿보게 했다. 다만 어떠한 해결도 없어 관객들의 호불호가 크게 갈릴 것으로 보인다.
정진영은 이러한 평가들에 "어렵다기보다는 논리적인 해석과 다른 경로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야기는 단순하고 쉽다. 그냥 관객들이 막 웃으면서 보는 영화가 되길 바랐다. 제가 생각하는 화두들이 관념적일 수도 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이지 않나. 내가 생각하는 내가 있고, 남들이 규정하는 내가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과 갈등한다. 그럼 나는 진짜 누구냐. 남들이 생각하는 나로 맞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부분은 그렇게 산다. 저도 그렇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걸 1시간 30분 동안 계속 이야기하는 건 또 다른 영역이었다. 그냥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관객들과 이야기의 파도를 타고 놀자 싶었다. 계속해서 다른 파도를 넘어가는 이야기 구조로 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처음 쓰는데 어떤 소재를 관습적으로 다루고 있었어요. 저는 약간 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익숙한 방식으로 펼쳐나가고 있던 거죠. 그래서 그 시나리오를 버렸어요. 어딘가에 사로잡히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이 나이에, 뒤늦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거면 흉내 내지 말고 마음 내키는 대로 가보자 싶었고, 기존 작법이나 관객들이 익숙한 곳으로 달려가지 말자고 했죠. 세상에 너무나 많은 유능한 감독님들이 계신데, 그 분들을 능가할 수도 없고 따라갈 이유도 없잖아요. 이상하게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제가 행복하기 위해선 이 길을 가야했어요."
관습에 젖지 않기 위해 절친한 이준익 감독에게도 시나리오를 보여주지 않았다던 정진영은 조진웅을 캐스팅하며 그에게 가장 먼저 보여줬다. 조진웅은 하루만에 "함께 하겠다"고 결정했다고. 정진영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이와 관련해 정진영은 "초고를 쓰자마자 보냈는데 하루만에 '하겠다'고 답이 왔다. 너무 고마웠다. 어렵지 않냐고 물어봤더니 '뭐가 어려워요. 딱 내 이야기인데'라고 하더라. 심지어 자기 부분은 토씨도 고치지 말라고 하는데, 너무나 행복했고 믿어줘서 기뻤다. 용기가 생겼다. 그 다음부터 다른 감독님들께 보여드렸다. 주연 배우로 조진웅을 캐스팅했다는 건 굉장히 으쓱한 일이다"라고 말해 웃음을 안겼다.
형구라는 인물에 '정진영'이라는 자아를 투영한 것이 아니냐는 물음엔 "형구라는 인물이 저인지는 모른다. 가급적이면 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순간 연민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직업군도 예술가를 선택하지 않았다. 충분히 거리를 두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네 이야기 아니야?' 하시는 분들이 있다. 이 이야기는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배우라는 사람들은 연기를 할 때마다 변신을 해야 해요. 저는 또 다른 나일 수도 있어요. 직업적인 것 말고도 '나는 뭘 하고 싶었던 사람이지?' 등을 생각하게 돼요. 꿈 역시 세상이 규정하는 꿈을 쫓아가는 삶을 살게 될 때가 있고, 저도 그래요. 어느 순간 이게 충돌하고요. 저에게도 끊임없이 묻는 말이에요."
'사라진 시간'의 시작은 독립영화였으나 조진웅이 붙고, 제작사 대표가 붙으면서 상업영화 모양새를 가지게 됐다. 정진영은 "이 영화는 예산을 크게 가면 안 된다. 이렇게 낯설고 실험적인 영화인데 자본이 많이 들어가면 이상해진다"며 "처음엔 누구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될 거 같아서 제 사비로 만들려고 했다. 공동제작자에 제 이름이 올라간 이유다. 조진웅이 자신이 출연한다고 선언을 해버려서 이렇게 커졌다. 그럼에도 제가 예산 한계선을 정했다. 규모가 커지면 제가 하고자 하는 방향과 달라졌을 거다. 예산이 적다고 해서 영화가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큰 정성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다음 작품은 모르겠어요. 첫 작품은 꿈이니까 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작품은 그것만으로는 안 돼요. 영화적 가치가 있어야 해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계획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개봉이라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있는 느낌이에요. 그 다음 산을 가야할지, 내려가야할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는 곳에 던져진 느낌이에요."
관객들이 그저 재밌게 즐겨주길 바란다는 정진영이다. 그는 "갈증이 있어서 연출을 한 게 아니다. 가보고 싶었던, 가야만 했던 곳에 간 느낌이다. 안 가도 되는데 가고 싶었던 곳이고 다녀와야지만 직성이 풀렸을 것 같다. 갈증과는 다르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할 때는 재보는데, 이건 앞뒤 안 보고 들이댔다. 갔다 왔더니 됐다. 아니었으면 평생 후회했을 거다"라고 전하며 웃어보였다.
[사진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이예은 기자 9009055@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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