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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장윤호 기자]1981시즌 LA 다저스의 개막전. 5만511명의 관중이 운집한 다저스타디움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전이 열렸다.
LA 다저스 토미 라소다 감독은 갑작스럽게 종아리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빠진 개막전 선발 제리 레우스 대신 20세의 멕시코 출신 좌완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에게 공을 건넸다. LA 다저스 역사상 첫 신인 투수 개막전 선발에 ‘페르난도매니아(Fernandomania)’의 전설이 시작된 순간이다.
하늘을 쳐다보고 높이 두 손을 모아 쳐드는 독특한 와인드업을 가진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는 전 날만 해도 다저스타디움에서 타자를 상대로 배팅 연습 투구를 했다. 그는 자신이 개막전 선발로 나서야 한다는 통보를 받은 후 24시간도 안 돼 마운드에서 첫 공을 던졌다.
상대 팀 휴스턴은 전 해인 1980 시즌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우승 결정전, 타이브레이커에서 LA 다저스를 탈락 시킨 팀이다.
그러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는 5피안타 5탈삼진으로 휴스턴을 셧아웃시키며 LA 다저스에 2-0 승리를 안겼다.
이후 그는 8경기(72이닝) 연속 승리 행진을 펼쳐 7완투승(5완봉승)에 68탈삼진, 믿기 어려운 평균 자책점 0.50을 기록했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는 좌완 투수로 ‘마구(魔球)’로 평가받는 스크류볼(screwball)을 구사하며 타자들을 교란시켰다.
그의 스크류볼은 3가지나 된다. 일반적인 슬라이더, 커브의 움직임과 반대 방향으로 꺾이는 공시 스크류볼이다. 오죽하면 타자의 눈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페이드어웨이(fadeaway)’로 불렸다.
1957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LA로 연고지를 옮긴 LA 다저스 월터 오말리 구단주는 지역의 멕시칸 등 중남미인들을 야구장으로 이끌기 위해 ‘멕시칸 샌디 쿠팩스’를 탄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작품이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였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는 1947년 재키 로빈슨이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된 역사의 뒤를 이어 1981년 단 한 시즌 만에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물었다. 멕시코는 물론 중남미 출신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고 미국의 문화권 안에 하나가 되게 했다.
40년이 지난 현재 페르난도 발렌수엘라(61)와 페르난도매니아 신드롬이 재조명 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발렌수엘라가 차별의 장애물들을 허물었다. 그는 아웃사이더 출신으로 메이저리그에 들어와 사회적인 문화를 바꾸었다. 그 과정은 재키 로빈슨, 박찬호(한국인), 노모 히데오와 스즈키 이치로(일본인), 토니 라제리(이탈리안) 알 시몬스(폴란드인) 등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는 1981년 신인으로 신인상과 사이영상을 동시에 수상한 기록을 세우며 1981년 LA 다저스가 뉴욕 양키스를 누르고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통산 성적은 173승153패, 2930이닝을 던져 2074삼진 평균 자책점 3.54이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는 그의 통역이기도 했던 하이메 하린과 현재 LA 다저스의 스페인방송 해설을 하고 있다.
1994년 LA 다저스에서 데뷔해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된 박찬호는 월터 오말리의 아들인 피터 오말리 구단주의 노력에 의해 탄생했다. 피터 오말리 구단주는 아시아에 주목해 박찬호를 스카우트했고 1년 뒤 일본인 노모 히데오가 뒤를 이었다.
[사진=마이데일리 DB]
장윤호 기자 changyh218@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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