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축구
[마이데일리 = 이현호 기자] 골키퍼는 외로운 직업이다.
그라운드에 극심한 안개가 드리우자 심판이 경기 중단 휘슬을 불었다. 양 팀 선수단 및 코칭스태프가 입김을 불며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단 한 명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옛 찰튼FC 골키퍼 샘 바르트람이 그 주인공이다.
이 사건은 현대 축구 얘기가 아니다. 정확히 84년 전인, 1937년 크리스마스에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에도 크리스마스 및 연말 연휴를 맞아 ‘박싱데이’가 진행됐다. 찰튼과 첼시는 런던의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크리스마스 매치를 치르고 있었다.
1-1로 팽팽하게 진행되던 후반 16분경, 경기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덮치자 주심은 경기 중단을 선언했다. 하지만 바르트람 골키퍼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20여분 동안 찰튼 골대를 지켰다. 그 누구도 바르트람에게 경기가 중단됐다는 말을 해주지 않아서 끝까지 ‘할 일’을 한 것이다.
모두가 라커룸으로 들어가고 20여분이 흘렀을 무렵, 한 경찰관이 경기장 시설을 확인하기 위해 그라운드를 돌다가 바르트람 골키퍼를 발견했다. 바르트람은 경찰관으로부터 뒤늦게 중단 소식을 듣고 나서야 장갑을 벗었다.
바르트람 골키퍼는 자서전을 통해 그 날을 돌아봤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짙은 안개가 깔렸다. 심판이 경기를 멈추자마자 안개가 걷혀서 다시 경기를 재개했다”며 앞서 한 차례 중단된 바 있다고 들려줬다.
이어 “그 당시 찰튼이 리그 1위 팀이었다. 멀리서 우리 공격수들이 공격하는 게 희미하게 보였다”며 “안개 때문에 경기가 중단된 것도 모르고 홀로 골대를 지키면서 기뻐했다. ‘첼시 녀석들, 하프라인도 넘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바르트람은 “시간이 갈수록 안개가 더 심해졌다. 도저히 아무것도 볼 수 없어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수비수들이 있어야 할 곳에 수비수가 없더라. 전부 다 공격하러 나간 줄 알았다. 그때 사람 형체가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경찰관이었다. 그 경찰관이 나를 보며 ‘도대체 여기서 뭐하세요?’라고 물었다. 그가 ‘경기는 20분 전에 끝났어요. 지금 여기에 아무도 없어요’라고 말해줘서 알았다”고 회상했다.
서운할 법도 한데 바르트람에게는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경찰관의 말을 듣고 나서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이미 찰튼 선수들은 샤워까지 마치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나와 동료들은 서로를 보며 폭소했다”는 게 바르트람의 기억이다.
요즘이야 강한 조명과 장내 아나운서의 우렁찬 안내 방송이 있어서 모두에게 공지가 가능하다. 하지만 열악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바르트람의 '웃픈' 사연은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현지 매체에 의해 회고되곤 한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이 해프닝이 재조명받고 있다.
[사진 = AFPBBnews, 당시 신문 기사]
이현호 기자 hhhh@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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