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교사 김혜인] 평소처럼 아이가 고양이 그림을 짚으며 “이야아아오”하고 고양이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그런데 갑자기 숫자가 쓰인 병풍으로 가더니 “24”를 가리켰다. 다시 고양이 그림을 가리켰다가 숫자 “24”를 가리키는 행동을 반복했다. 처음엔 그저 산만하게 이것저것 가리키는 줄로만 여겼다.
문득 깨달았다. 주말마다 아이를 데리고 고양이를 키우는 언니네 집에 가는데, 언니가 바로 아파트 24층에 살고 있다. “그래, 맞아. 고양이 ‘삐삐’가 24층에 살고 있지?”라고 말하자 아이가 그제야 행동을 멈추었다.
나는 앤드루 솔로몬 책 <부모와 다른 아이들>이 떠올랐다. 자폐증 소녀 칼리 플라이슈만은 어릴 때 중증 인지 장애 진단을 받았으며,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당연히 칼리 가족은 그가 말을 이해할 수 있다거나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칼리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타이핑을 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책에서 소개한 칼리의 글은, 그 가족 표현대로 ‘분명하고, 지적이고, 감성적’이었다.
감히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언어 표현이 더딘 내 아이도 제 나름의 방법으로 의사를 표현한다. 최근에는 사운드 패드 장난감을 많이 이용한다. 아이가 “우유”라는 말이 나오는 버튼을 누른 뒤 냉장고 앞으로 가서 손가락으로 문을 톡톡 가리킨다. 우유를 달라는 의미다.
남편이 어머님과 통화를 하다가 아이에게 어머님 목소리를 들려주며 “할머니 해 봐”라고 하자, 얼른 장난감으로 달려가 ‘할머니’라는 말이 나오는 버튼을 누른다. 아직 할머니를 말하지 못하는 아이가 할머니를 표현하는 방법일 테다.
얼마 전에는 책을 활용했다. 아이가 즐겨 보는 책 중에 <좋아해>가 있다. 이야기는 ‘나비는 싱그러운 꽃을 좋아해’로 시작해서 강아지, 나무, 구름이 각각 좋아하는 대상이 나온다. 아이가 그 책을 가져오더니 나를 쳐다본다. “좋아해”라고 제목을 읽어주자 평소와 달리 책을 넘기지 않았다. 대신 아이는 자신의 애착 이불을 손가락으로 쿡쿡 가리켰다. “이불”이라고 말해 주어도 이불을 계속 가리켰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아이 이름을 넣어 “○○는 이불을 좋아해”라고 말해 주었다. 아이가 기뻐하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좋아한다’는 말 의미를 알고 있다니, 마음이 뭉클했다. 매일 밤 아이에게 “사랑해”라고 말해 주는데, 혹시 그 말의 의미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자폐 아이를 키우는 한 아버지가 칼리 플라이슈만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아이가 무엇을 알아주길 원할지 물었다고 한다. 칼리의 답장은 이러했다.
‘내 생각에 아이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랄 거예요.’
아이가 말할 줄 아는 단어는 아직 ‘엄마’와 ‘아빠’뿐이다. ‘엄마’를 잘 말할 수 있게 된 건 두 달쯤 되었고 ‘아빠’를 말하게 된 지는 이제 나흘쯤 되었다. 보통 첫돌 전후에 하는 말을 26개월인 이제야 잘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느리긴 느리다.
게다가 좀 다른 구석이 있다. 특정한 억양으로만 말하고, 정작 엄마나 아빠에게 요구 사항이 있을 때는 말하지 않는다. 엄마에게 또는 아빠에게 다가올 때 말하거나 사진을 가리키며 말한다. 또 혼자 놀다가 아무도 바라보지 않으면서 문득 크게 외칠 때도 많다.
그렇지만 아이 내면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우렁차게 “엄마!” “아빠!”하고 외치는 그 말 전후에 어떤 마음을 잔뜩 담고 있는지, 마치 행간의 뜻을 파악하는 것처럼 가만히 들여다본다.
|김혜인. 중견 교사이자 초보 엄마. 느린 아이와 느긋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교사 김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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