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교사 김혜인]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행주, 밀대 등을 파는 노점상인이 엄마를 알은척했다. 오가는 길에 물건을 사며 안면을 튼 모양이었다.
상인이 내게 “아, 어머님이 전에 얘기하신 막내 따님이세요?” 하고 물었다. 도대체 엄마는 행주를 사면서 막내딸 얘기는 왜 하셨을까 하던 차에 엄마가 느닷없이 “네. 학교 선생님이에요”라고 자랑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요즘 세상에 직업이 교사인 게 무슨 큰 자랑거리라고 이러시나. 나는 더 민망해져 그 상인에게 얼른 인사하고 엄마를 병원으로 이끌었다.
자식 자랑을 팔불출로 여기던 우리 엄마의 이런 변화를 보니 많이 늙으셨나 보다. 모르긴 몰라도 손주 자랑 또한 대단하신 것 같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이가 버튼이 눌린 것만 하나씩 가리키며 해당 층수를 크게 외쳤다. 사람들은 웃었지만 나는 쑥스러워하며 “좀 작게 말해”하고 아이를 타일렀다. 그런데 누군가 “벌써 숫자를 아네”하고 칭찬했다. 그러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1부터 100까지 다 알아요” 하시는 게 아닌가. 느닷없는 손주 자랑에 나는 더 어쩔 줄 몰랐다.
내 아이는 발달이 느려서 남들보다 잘한다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할머니 눈에는 손주가 숫자를 익힌 게 놀랍고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심지어 아이가 오히려 너무 똑똑해서 남들과 다르게 크고 있을 뿐이라고 여긴다.
발달이 늦된 아이가 숫자나 문자를 특별히 좋아하는 건 그다지 좋은 징후가 아니다. 이때 주로 관찰되는 ‘제한된 관심사’의 대상이 숫자나 문자다.
세 돌 전후에는 숫자나 문자를 일찍 터득하는 것보다 언어 발달 정도가 지능과 연관 있다고 본다. 아이는 말 하는 게 많이 더디다. 그래서 아이가 숫자에 이어 알파벳을 다 익혔을 때도 나는 마냥 기쁘지 않았다.
그런데 숫자를 배운 뒤에는 알파벳을 익히는 게 평범한 순서인지, 아이가 숫자를 읽는 모습을 이웃집 엄마가 보더니 “혹시 알파벳도 알아요?”하고 물었다. 나도 모르게 “네, 조금요”하고 말끝을 흐렸다. 이웃집 엄마는 “저희 애는 이제야 숫자를 익히기 시작했어요” 하며 내 아이가 대단하다는 칭찬 일색이었다.
돌이켜보면 아이가 일찍부터 정확한 음정으로 동요를 흥얼거리고, 한 번 가본 길을 정확히 기억할 때도 이를 놀랍고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발달 지연’이라는 진단에 묶여 아이의 발전을 의심하고 점검하고 염려했다.
“선생님, 아이가 알파벳도 다 익혔어요.” 오늘은 ABA(응용행동분석) 치료사에게 겸손한 태도로 그러나 조금은 뿌듯한 마음을 담아 이야기했다.
치료사는 염려하지 않고 아주 기뻐했다. 내가 “숫자와 알파벳을 활용해서 관심사를 더 넓혀 주려고요”라고 하자 “그럼요. 좋은 생각입니다”라고 반겼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나도 엄마처럼 아이 자랑을 슬쩍 해볼까. 느닷없는 자랑이 너무 남사스럽긴 해도, 엄마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하는 게 좋으니까. 내 아이도 그럴 테니까.
|김혜인. 중견 교사이자 초보 엄마. 느린 아이와 느긋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교사 김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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