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
[시조시인·여행작가 신양란] 2017년 7월, <가고 싶다, 모스크바>에 들어갈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난 우리 부부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호텔까지 아에로익스프레스(공항 특급열차)를 타고 벨로루스카야역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2호선 지하철로 환승해 호텔 인근 파벨레츠스카야역에 갈 계획이었다.
일단 아에로익스프레스를 타고 벨로루스카야역에 무사히 내린 다음, 지하철 패스를 샀다. 그동안 키릴 문자 읽는 법을 열심히 공부한 남편은 어리바리한 마누라 앞에서 조금 뽐내는 기분으로 그 일을 거뜬히 해낸 다음,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얼굴색이 환해지며 “일단 중요한 고비는 넘겼다”고 했다. 어쩐지 이번 여행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잠시 뒤 남편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 내 가방! 가방이 어딨지?”라고 했다. 그의 등에 있어야 할 카메라 가방이 없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에로익스프레스를 탄 다음 어깨가 아프다며 그가 의자 아래에다 카메라 가방을 내려놓았는데, 그만 그걸 두고 내린 것이다.
사태를 깨달은 남편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카메라…. 환전한 돈도 다 거기 들었는데….” 거짓말처럼, 우리는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빈손이 되고 말았다.
우리 부부의 여행은 대개 유람이 아니라 집필에 필요한 자료 수집을 위한 강행군이기 일쑤다. 여행 후 원고 정리 작업은 글 작가인 내 몫이지만, 여행 중에는 사진작가인 남편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런데 여행을 시작도 하기 전에 사진작가가 무기를 탈탈 털리고 빈손이 되었으니 참으로 황당하고 막막한 일이었다.
그러면 남편이 기차에 두고 내린 카메라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십몇만 원짜리 보조 배터리. 이건 잃어버리면 좀 아까운 물건이다. 큰아들이 제 아빠 생일에 용돈을 모아 선물한 몇십만 원짜리 태블릿. 이건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잃어버리면 안 되는 물건이다. 이번 여행에서 쓰려고 300만 원을 바꾼 유로화. 이게 없으면 무전여행자 신세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건 남편 카메라와 렌즈였다. 카메라 본체와 망원 렌즈, 표준 렌즈 등을 대강 계산하니 600만 원이 조금 넘는다고 했다. 결국 남편은 천만 원가량 값어치가 들은 가방을 기차에 놓고 내린 것이다.
그러나 가방을 잃어버림으로써 입는 손해가 과연 그것뿐일까? 기분이 엉망이 된 상태에서 무슨 자료 수집을 하겠는가? 결국 수백만 원 들여 떠난 여행이 무의미하게 될 게 뻔했다.
그렇지만 메고 있는 가방도 훔치려 드는 유럽에서, 기차에 두고 내린 가방을 무슨 수로 찾겠는가. 그것도 기차에서 내린 지 20여 분이 지났는데. 애태워봤자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포기할 수 없다며 큰 가방 두 개를 내게 맡기고 아에로익스프레스 역으로 뛰어갔다.
남편은 일단 처음 눈에 띈 역무원에게 “가방을 기차에 놓고 내렸다”는 말을 몸짓말 90%에다 영어 10%를 섞어서 했는데, 불행히도 그는 러시아어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다른 역무원을 붙잡고 같은 말을 하고 또 했지만, 상황은 똑같았다.
결국 타고 왔던 기차 안으로 돌진해 칸칸마다 뒤지고 다녔는데, 문제는 그 기차가 곧 출발할 시각이 닥쳤다. 공항까지 논스톱으로 운행하는데, 만약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출발해 버리면 공항에 도착해 무임승차로 몰릴 판이었다. 그러면 큰일이라는 생각을 한 남편은 할 수 없이 출발 직전 기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다른 역무원을 붙잡고 사정 설명을 하니 너무나 절박한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는 외국인이 딱했던지, 인포메이션 센터를 가리키더란다. 그제야 남편은 인포메이션 센터에 생각이 미쳐 그곳으로 달려가 직원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남편 : 가방을 기차에 놓고 내렸다.
직원 : 잃어버린 가방이 무슨 색이냐?
남편 : 검정색이다.
직원 : 그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남편 : 카메라와 렌즈다.
직원 : 카메라 종류가 무엇이냐?
남편 : OO 카메라다.
이런 대화가 오고 간 끝에, 그 직원이 책상 아래에서 가방 하나를 들어 올리는데 바로 남편이 기차에다 두고 내린 카메라 가방이었다. 공항에서 도착한 기차를 청소하던 사람이 승객이 놓고 내린 가방을 인포메이션 센터에 맡겼던 듯하다.
어쨌든 이런 식은땀 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남편은 유럽에서 잃어버렸던 물건을, 그것도 천만 원어치가 든 가방을 되찾은 희귀한 경험을 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여행자의 성당 공부><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이지혜 기자 imari@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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