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정원가의 열두 달 |저자: 카렐 차페크(글), 요제프 차페크(그림) |역자: 배경린 |펜연필독약
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우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다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북에디터 이미연] 겨울이다. 가을을 들여다볼 새도 없이 갑자기 겨울이 왔다.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라지만 첫눈부터 폭설을 원한 건 아니었다. 똑똑 노크하고 오길 기대했는데 대포로 현관을 날려버리며 들어온 듯했다.
쌓인 눈을 보고 있자니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이 떠올랐다. 씨를 뿌리고 꽃을 가꾸며 열매 맺고 또다시 씨를 뿌리는, 정원가 이야기가 형제인 요제프 차페크의 그림과 어우러져 책에 담겼다.
정원가는 1월부터 12월까지 쉴 틈이 없다. 땅을 일구는 1월부터 식물을 키워내는 계절을 지나 짚이불 덮어주는 12월까지, 계절마다 월마다 해야 할 일이 많다.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일도 있고 기쁨과 낭만을 만끽할 일도 있다.
차페크는 “정원가란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땅 위에 존재하는 것만 보지만 정원가는 그 아래까지도 본다.
그런 면에서 정원가는 편집자와 닮았다. 정원을 가꾸는 일처럼 책 만드는 일도 흙을 가꾸는 일이다. 기획부터 출간까지 단계마다 해야 할 일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 쉴 틈 없이 바쁜 것은 말해 무엇할지.
차페크는 “정원에 장미가 핀다면 그건 그냥 장미가 아니라 ‘그의’ 장미가 된다”고 말한다.
책도 편집자에게 그렇다. 몇 개월간 편집자와 동고동락한 책은 서점에 놓인 수많은 책 중 ‘그의’ 책이 된다. 서점에 가면 ‘내 책’이 어디 있나 두리번거리고 ‘너 여기 잘 있구나.’ 눈도장을 찍는다.
<정원가의 열두 달>에는 식물 목록이 무려 10쪽이나 될 정도로 많은 식물이 등장한다. 아는 이름보다 모르는 이름이 훨씬 많아도 문제없다. 정원 일을 말하지만 삶의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11월, 12월에 담긴 겨울 이야기가 특히 그렇다.
차페크는 정원가에게 겨울은 다음 봄을 위한 설계도를 완성하는 계절이라고 설명한다. 자연에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들어설 뿐이라고 덧붙인다.
특히 2024년을 매일 겨울처럼 보낸 나에게 차페크의 다음 말은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지금 해내지 못한 일들은 4월에도 일어날 수 없다. 미래란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싹눈 속에 자리하고 있다.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지금 우리 곁에 자리하지 않은 것들은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 단지 땅속에 숨어 있기에 새싹을 보지 못하듯, 우리 내부에 자리하고 있기에 우리는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185쪽)
벌써 2024년 마지막 달이다.
2024년은 버텨냈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한 해였다. 겨울이 없다면 봄도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자꾸 잊게 될 정도로. 겨울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지만 결국 봄은 온다. 그러니 지금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자. 다음 봄을 준비하는 정원가의 마음으로.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정원의 꽃밭이나 수목을 가꾸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정원사’이지만 책 표기를 따라 ‘정원가’로 적었다.
|북에디터 이미연. 출판업계를 뜰 거라고 해 놓고 책방까지 열었다. 수원에 있지만 홍대로 자주 소환된다. 읽고 쓰는 일을 사랑한다.
북에디터 이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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