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종합
재일동포 가운데는 일본 프로야구를 휩쓴 전설들이 숱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런 반열에 오른 재일동포 축구선수들은 없다. 같은 한국 사람인데도.
3,085 안타 장훈과 400 승 김정일. 그들의 기록은 일본 야구에서 다시는 나오기 힘든 것으로 꼽히는 대선수들이다. 1,492 경기 연속으로 1만3,686 회를 교체 없이 출전해 세계기록을 세운 “철인” 김지헌, 한신 타이거스 4번 타자를 거쳐 “대타의 신”으로 불린 황진환, 한신의 홈런 타자였으며 ‘히로시마 카프스’ 감독인 박귀호 등 재일동포를 빛낸 선수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황진환은 현역 때 “한국인의 혼을 보여주고 싶다. 일본 야구에는 귀화한 선수 등 한국인이 많다. 1군 선수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인 선수는) 식생활의 차이로 인해 체격이 크고 체력이 강하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재일동포 야구선수들은 한국인 특유의 투혼으로 남의 나라에 사는 모진 설움·고통을 이겨냈다. 정상에 섰다. 장훈 등 모국에도 영원히 이름을 남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일본 프로 축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재일동포 감독들이 있다.
조귀재 ‘교토 상가’ 감독(56)과 김명휘 ‘아비스파 후쿠오카’ 감독(43). 모두 일본 프로축구 1부 감독인 두 사람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일본 이름이 없다. 한국 이름을 그대로 쓴다. 시합 전 소개 때도 한국 발음 그대로 불린다. 재일동포로서는 참으로 쉽지 않은 일. 그만큼 단단한 정신력과 깊은 모국애를 가졌다.
두 사람은 이름 없는 프로선수였다. 그러나 조귀재는 14년째, 김명휘는 5년째 J리그 감독을 맡고 있다. 한국의 K리그에서도 이름을 크게 날린 국가대표 출신이 아니면 감독을 하기 어렵다. J리그는 평균 관중 수가 K리그의 2배. 구단 숫자나 선수도 훨씬 많다. 그런 곳에서 내놓을만한 경력도 없는 재일동포들이 감독을 맡고 있으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두 사람은 선수들 괴롭힘 사건으로 잘렸다가 다시 돌아왔다. 뛰어난 감독 실력이 없다면 재일동포들이 다시 선택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귀재 감독 “실패해도 죽는 것 아냐…실패 두려워 말고 뛰어라”
조귀재 감독은 교토 출신.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축구가 센 조선학교는 다닌 적이 없다.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7년간 J리그 등 몇 개 리그에서 수비수로 82경기 출전이 전부였다.
은퇴 후 독일 쾰른 대에서 축구 지도법을 공부했다. ‘세레소 오사카’ 코치 등을 거쳐 2012년 2부 ‘쇼난 벨마레’의 감독이 되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공격 위주의 전방 압박 축구”라는 “쇼난 방식”을 확립했다. 첫해 2부 2위를 해 J-1로 올렸다. 1부, 2부를 오가며 J-2에서 두 번 우승. 1부로 돌아온 18년 ‘YBC 르방컵’에서 구단 역사상 첫 우승을 일궜다. 쇼난을 후원하는 대학의 객원 교수로 임명되어 현역 프로 감독으로 드물게 강의도 했다. 공부하는 지도자였다. 쇼난에서 한국 국가대표 한국영과 이정협을 지도했다.
그러나 19년 일부 매체가 직장 내 괴롭힘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조사 끝에 견책 처분과 함께 5경기 출전 금지 징계를 받았다. 쇼난을 떠났다. 그러나 구단 대표는 조귀재가 “사람을 키우는 능력과 사람에게 동기를 주는 인간성을 가진 지도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 평가는 멀리 가지 않았다. 곧 대학 감독으로 발탁됐다. 징계가 풀리자마자 21년 ‘교토 상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교토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 구단. 박지성·고종수·최용수·이정수·곽태휘·정우영·김남일 등 국가대표 선수들이 뛰었다. 한국 청소년 대표로 뽑히기도 했으나 차별을 견디지 못하겠다며 일본 귀화해 일본 대표가 됐던 이충성, 현재 모교 게이오 대 코치인 황대성 등 교포들도 활약했다.
조귀재는 12년 동안이나 J-2에서 헤매던 교토 재건에 성공했다. 취임 1년 만에 J-2 최저 실점 기록을 세우며 1부 승격을 이끌었다. 올해 5년째. 쇼난 시절과는 달리 “화내지 않는 지도법”을 실천했다. 그의 지도 철학은 담백하다.
“부임하며 선수들에게 ‘나는 실패한 사람이다. 여러분이 도전해서 실패해도 화내거나 나무라지 않겠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뛰어달라’고 당부했다. 억지로 끌고 가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꽉 짜인 하나로 움직이는 선수들을 만들고 싶다. 감독이란 사회의 일부일 뿐이다. 축구 역시 결국 축구일 뿐이다. 실패해도 죽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선수들이 축구를 더 즐길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김명휘 감독 “세심한 배려·주의 없으면 강한 조직 될 수 없다”
김명휘 감독은 초·중 모두 조선학교를 다니며 축구를 했다. 그러나 고교는 일본 학교를 나왔다. 2000년 프로 축구 선수를 시작했으나 2011년 은퇴했다. 02년 성남 일화천마에 입단했으나 한 경기도 못 뛰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J-1 리그에서 1년여 뛰었으나 3경기 출전이 전부. 11년 선수 생활 대부분을 2부에서 5~6부까지 변방에만 머물렀다. 조귀재 감독처럼 철저한 무명의 수비수.
그는 은퇴 이듬해 ‘사간 도스’ 유소년 코치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U-15, U-18 감독을 거쳐 18년 끝 무렵 1군 감독이 되었다. 21년에는 7위까지 끌어올리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22년 S급 지도자 자격증이 A급으로 강등되는 징계를 당하는 아픔을 겪었으나 8개월 만에 ‘마치다 젤비아’의 수석 코치로 돌아왔다. 23년 구단이 1부 승격에 이어 24년 3위에 오르는 도약에 힘을 보탰다.
그러자 구단 창설 30년을 맞이한 ‘아비스파 후쿠오카’가 김명휘를 새 감독으로 영입했다. ‘사간 도스’ 지휘 이후 4년만. 후쿠오카는 1999년 당시 한국 올림픽 대표였던 이관우의 영입을 발표했다. 그러나 K-리그에서 규정 위반이라며 반발하자 입단 계약을 취소한 적이 있다.
구단의 김명휘 선택에 반발이 적지 않았다. 2007년부터 주요 후원사였던 명란젓 업체가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후쿠오카의 회장은 김 감독을 위한 ‘신체제 발표회’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지도했던 마치다의 놀라운 성장에 공헌한 점을 높이 사 감독으로 뽑았다”고 말했다. 오로지 지도자 능력만 봤다는 설명.
김명휘는 “이전에는 승리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 자신을 잃어버린 부분이 있었다. 세심한 배려·주의가 없으면 강한 조직이 될 수 없다. 일방 소통이 되지 않도록 선수들의 숨소리와 분위기를 세밀하게 살피면서 접근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교토와 후쿠오카 모두 올해 출발이 좋지 않다. 그러나 조귀재·김명휘 두 감독 모두 쉽게 꺾이고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역사에 남은 대기록들을 남겼던 재일동포 선배 야구선수들처럼 ‘한국인의 투혼’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을 것이다. 정상에 설 것이다. 한국적, 한국 이름, 한국 발음을 고집하는 그들에게 다함 없는 박수와 성원을 보내자.
손태규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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