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NBA
어머니와 딸이 써 내려가는 새로운 역사에 미국이 흥분하고 있다. 모녀가 모두 농구 스타인 경우는 세계에서도 드문 일. 하버드대 농구선수였던 앨리슨 피스터(49)는 미국 남자 프로농구(NBA) 최고 명문 ‘보스턴 셀틱스’의 부사장. 딸인 새라 스트롱은 대학 농구 절대 강자 코네티컷대 1학년. 올해 최우수 신인. 두 사람은 농구 역사의 새 장을 열고 있다.
1998년 스탠퍼드대에서 열린 여자 대학선수권대회 1회전 경기. 16순위 하버드대가 1순위 스탠퍼드를 71-67로 꺾었다. 남녀 통틀어 대학선수권대회 역사상 16순위가 1순위를 이긴 것은 처음. 그것도 운동 장학생이 없어 ‘동아리 농구부’라고도 할 수 있는 하버드가 체육 강호 스탠퍼드를 눌렀으니 그야말로 대이변.
1965년 프린스턴대가 남자 대회 4강까지 간 적은 있었다. 그러나 하버드 승리는 ‘아이비리그’ 여자농구의 선수권대회 첫 승리이기도 했다. 1000여개 농구부 가운데 64개 대학을 뽑아 치르는 선수권대회가 왜 ‘광란의 3월’로 불리는지를 생생하게 입증한 경기였다.
그 ‘광란’의 주역은 단연 4학년 앨리슨 피스터. 62위로 평가받았던 하버드는 당시 전국 득점 1위(평균 28.5점)며 ‘올 아메리칸’인 피스터를 앞세웠다. 그녀는 35득점, 13리바운드, 5가로채기를 기록했다. 하버드와 아이비리그 농구 역사뿐 아니라 선수권대회 역사를 새로 쓴 맹활약.
패장인 스탠퍼드 감독은 17년 뒤 “180cm 포워드인 피스터를 막을 수 없었다. 작은 선수에게는 너무 크고 큰 선수에게는 너무 작았다. 정말 대단한 선수였다.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우리는 진흙 속에서 뛰는 것 같았다”고 극찬했다.
피스터는 “우리는 여자 대학 농구 역사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은 일을 해냈다”고 옛 추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피스터는 딸이 만들고 있는 새 역사를 보면서 “정말 놀랍다. 이제는 모든 것이 딸 아이와 코네티컷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엄마로서 이보다 더 자랑스러울 수 없다”고 말했다.
■엄마 빼닮은 딸…미국 농구에 이런 모녀 선수는 없었다
역사를 세운 지 27년 뒤인 지난 1일. 피스터는 코네티컷대가 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서든 캘리포니아대를 78-64로 꺾고 4강에 진출하는 것을 관중석에서 지켜봤다. 이미 11번 우승을 차지한 코네티컷의 24번째 4강. 이 기록들은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깨어지기 힘든, ‘넘사벽’이란 평가.
승리 주역은 31점의 페이지 베커스와 함께 피스터의 딸 새라 스트롱. 그녀는 40분을 다 뛰면서 22점, 17리바운드, 4도움을 만들었다. 188cm 포워드 스트롱이 195cm가 넘는 센터 등을 상대로 리바운드 17개나 잡아내자 중계진도 탄성을 질렀다. 이제 겨우 1학년.
“농구선수로서 못 하는 것이 없다”는 만능선수 스트롱은 선수권대회 4경기 평균 17점, 11.75리바운드, 5도움을 올렸다. 64강전에서는 블로킹 5개를 잡아내는 놀라운 탄력성을 보였다. 올해 38경기 전부를 선발로 뛰면서 평균 17점, 9리바운드, 4도움을 기록. 올해 ‘빅 이스트’ 최우수 신인. 전미 최우수 신인 1순위다.
스트롱은 마치 4학년 선수처럼 침착·노련하고 성숙한 경기력을 보여준다는 평가. 센터에서 포인트 가드까지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선수. 특히 상대의 빈자리를 파고드는 송곳 같은 패스 능력은 찬탄을 자아낸다. 긴 팔을 활용하는 공포의 수비력에다 워낙 몸놀림이 부드러워 아름다운 농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코네티컷 12번째 우승은 신입생 그녀의 활약에 달려있다.
피스터는 이런 딸을 보면서 과거 하버드 시절 자신의 특별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는 고향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최고 농구 선수. 고교 졸업생 대표를 할 정도로 공부도 잘했다. 수많은 대학의 장학금 제의를 뿌리치고 자비로 다녀야 하는 하버드대를 선택했다.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아이비리그 농구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피스터는 아이비리그 ‘올해의 선수상’을 세 번 수상했다. 아이비리그 기록. 아이비리그를 넘어 ‘미국 올스타’에도 뽑혔다. WNBA 신인 선발에 뽑힌 첫 아이비리그 선수. 그 뒤 16년 동안 아이비리그 선수가 선발된 적이 없다. 통산 2,312득점·1,157리바운드는 지금까지 하버드의 기록. 아이비리그 농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로 꼽힌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거둔 놀라운 성취. 공부를 잘하면서 운동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피스터는 하버드 졸업 뒤 WNBA 신인 선발 5위로 뽑혀 로스앤젤레스 스파크스 등에서 10여 년을 뛰었다. WNBA 올스타. 그러면서 스페인, 프랑스 등 해외에서도 18년간 뛰었다. 당시 유럽 농구에서 활약하던 고교 친구를 만나 결혼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스트롱을 낳았다.
■ 엄마의 ‘역할 모범’, 농구 선수 딸을 슈퍼스타로 만들다
스트롱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역할 모범이었다. 피스터의 훈련·경기 때마다 사라는 늘 체육관에 함께 있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농구 기본을 배웠다. “그 애는 농구와 함께 자랐다. 자연스럽게 농구에 끌렸다. 운동 능력이 뛰어난 아이였다.”
피스터는 딸이 자신을 많이 닮았다고 느낀다. 둘 다 수줍음 많은 성격. 하지만 농구장에서는 누구보다 열정 넘치게 경쟁한다는 것: “하지만 사라는 나보다 훨씬 더 재능 있고 다양한 경기를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예상대로 스트롱은 빠르게 성장했다. 고교 때 세계청소년대회 금메달에다 세계 3x3 월드컵에서 3연속 금메달을 땄다. 미국 최우수선수.
피스터는 2016년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곤 여자농구가 아닌 NBA에 눈을 돌렸다, 대학 전공을 바탕으로 1년간 NBA 운영 연수 과정을 마친 뒤 G-리그 선수 관련 부서 책임자로 일했다. 이어 보스턴 셀틱스의 선수 개발·농구 운영 부서로 옮겼다.
셀틱스는 최근 61억 달러(약 8조9,554억 원)에 팔렸다. 23년 미식축구 워싱턴 커맨더스의 60억5,000만 달러 매각 기록을 넘어서는 미국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고 금액. 79년 역사 동안 18번이나 우승했던 구단다운 몸값이었다.
피스터는 현재 선수발전·조직성장 담당 부사장. 구단의 유일한 여성 임원. NBA 임원을 맡고 있는 소수의 흑인 여성 중 한 명. 미국의 모든 프로구단 통틀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여성. 그녀는 선수로뿐만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농구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남기고 있다.
스트롱은 이미 ‘슈퍼스타.’ 미래의 미국 농구 전설이 될 것으로 꼽힌다. 베커스와 함께 올림픽 금메달 6개의 다이아나 토라지, 5개 수 버드, 3개 브리아나 스튜어트, 2개의 마야 무어 등 쟁쟁한 코네티컷 선배들을 이을 큰 재목으로 클 거란 예상.
40년째 코네티컷을 이끌며 1,244승에 승률 88%인 지노 오리엠마는 “새라는 가르침 받기를 정말 좋아한다. 그녀와 대화를 나눌 때면 마치 영혼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 질문을 많이 한다. 세상에서 가장 배우고 싶어 하는 선수”라 했다. 아직 신입생에 대한 미국 대학 농구 사상 최고 감독의 더할 나위 없는 칭찬. 농구 능력을 넘어서 스트롱이 선수와 인간으로서 기본 됨됨이를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래서 성장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한다.
그런 자질·품성을 선수로도 사회인으로도 크게 성공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을 것이다. 스트롱은 “엄마는 내게 정말 큰 영향을 주셨다. 엄마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서 뛰셨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셨다. 항상 내 곁에 계셨다. 부모님 두 분 다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세계 유명 농구선수들 가운데 자식이 부모만큼 유명 선수가 된 경우는 아주 드물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세 아들 가운데 둘을 대학 선수로 키웠으나 거기까지였다. 르브론 제임스는 갖은 구설수 속에 NBA 사상 처음으로 부자가 같은 구단에서 뛰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아들은 2부리그에서 주로 뛰고 있다. 샤킬 오닐의 아들도 NBA에 가지 못한 2부 선수.
그러나 NBA 16년 경력의 델 커리는 스테픈 등 두 아들 모두 NBA 선수로 키웠다. 스테픈은 최고의 슈터. 1984년 올림픽 여자 농구 금메달 파멜라 멕기의 아들 저베일 맥기는 2020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NBA에서 3번 우승했다. 호주 여자 국가대표 앤 머래이의 딸 미셀 팀스는 1996년 올림픽 은메달에다 호주와 중국 국가대표 코치를 지냈다.
스트롱은 얼마나 더 성장할 것인가? 어머니의 업적·명성을 뛰어넘어 어떤 농구 역사를 새롭게 써나갈지 궁금하다.
손태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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