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ESG 경영컨설턴트 심준규] 혹시 ‘녹서’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한자가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데, 영어로는 ‘그린 페이퍼’다.
녹서는 정책이나 전략 수립 전 다양한 이해관계자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공식 협의 문서를 의미한다. 즉 최종 결정 전 폭넓은 대화와 토론을 촉진하는 도구다. 정책 품질과 수용성을 높이는 핵심 요소다. 유럽연합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는 이미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포용적 접근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듣는 정책’의 기본 틀을 제공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자 의견을 체계적으로 수렴하고, 정책이나 전략에 반영하는 과정을 제도화하기 때문이다. 현장 목소리가 의사결정에 반영돼 더 실효성 있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대화 중심의 접근법을 통해 정책 입안자와 기업 경영진은 더 현명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가 반영된 정책과 전략은 실효성과 지속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비용과 시간이 더 들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갈등을 줄이고 진정한 혁신을 이끄는 지름길이 된다.
유럽연합(EU)은 ‘지속가능한 기업 거버넌스’ 협의 과정을 통해 고객, 협력사, 임직원, 시민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유럽 그린딜’ 정책 수립 과정에서도 포용적 대화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현실적인 정책을 만들었다. 이런 접근법은 정책의 실효성과 수용성을 크게 높인다.
영국과 호주에서도 포용적 접근은 ‘듣는 정책’의 상징이 됐다. 영국은 산업 정책 수립 시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협력사, 지역사회, 노동자들의 의견까지 폭넓게 수렴했다. 호주는 기후변화 대응 정책에서 자원 산업 종사자, 농촌 주민, 환경단체의 다양한 관점을 정책에 반영해 균형 잡힌 전략을 수립했다.
이 사례들의 공통점은 정책 품질과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핵심 요소가 ‘듣는 행위’다. 현장 목소리를 듣는 것은 더 나은 정책을 만드는 시작점이자 지속가능성의 기반이다. 에너지 전환, 탄소중립, 순환경제와 같은 복잡한 문제일수록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견 수렴이 중요해진다.
기업 경영에서도 포용적 접근법은 지속가능경영의 기본이 된다. 덴마크의 세계적 제약기업 노보 노보디스크는 ‘블루프린트 포 체인지’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 의견을 수렴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인슐린 제조 선도기업으로서 치료제 개발과 가격 정책 결정 전에 환자, 의료진, 약사, 유통업체, 정부 관계자들과 폭넓은 대화를 진행한다.
포용적 접근을 통해 노보디스크는 개발도상국에 맞는 혁신적인 의약품 공급 모델을 개발했다. 현지 환자들의 경제적 현실, 의료 인프라 한계, 약사의 유통 문제점 등 다양한 현장 의견을 수렴해 맞춤형 솔루션을 설계했다.
그 결과 단순한 자선사업이 아닌, 현지 상황에 적합한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는 성과를 이뤘다.
네덜란드 글로벌 소재·영양 기업 DSM은 ‘미래 대화’라는 포용적 프로세스를 운영한다. 석유화학 중심에서 친환경 바이오 소재 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연구원, 협력업체, 고객사, 환경단체, 소비자 대표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체계적인 대화 체계를 구축했다. 특히 신소재 개발 방향을 결정할 때 환경 영향과 시장 수용성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DSM은 대화 중심 접근법의 결과 전통적 화학기업에서 지속가능 소재 선도기업으로 성공적인 전환을 이뤘다. 바이오 기반 플라스틱, 친환경 코팅 소재, 지속가능한 사료 첨가제 등 혁신적인 제품 개발에 성공했으며,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대화를 통해 얻은 통찰이 기반이 됐다. 혁신 제품들은 환경 영향을 줄이면서도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일본 글로벌 사무기기 제조사 리코(Ricoh)는 ‘지속가능한 환경경영 협의체’로 포용적 의견 수렴을 제도화했다. 복사기·프린터 제조 기업으로서 새로운 환경 정책이나 제품 개발 방향을 결정할 때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협의체를 정기적으로 운영한다.
이러한 기업 사례에서 지속가능경영의 기본이 ‘듣는 경영’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객, 협력사, 직원, 지역사회 등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기업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단순한 PR 활동이 아닌 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핵심 전략이다.
효과적인 의견 수렴을 위해 다음 세 가지 핵심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기업과 정책 입안자는 열린 대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전략 수립 초기부터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단순한 의견 청취가 아닌 공동 창조(co-creation)의 과정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둘째, 조직은 포용적 의견 수렴 프로세스를 확립해야 한다. 고객, 협력사, 임직원, 지역사회 등 다양한 관점을 균형 있게 반영하고 소외된 그룹의 의견까지 듣고 관점 충돌을 창의적 해결책의 기회로 삼는 자세가 중요하다.
셋째, 경영진은 실행력과 책임감을 갖춰야 한다. 수렴된 의견을 전략에 반영하고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유하며 지속적인 경영 시스템으로 정착시켜 경영 시스템으로 안착시켜야 한다.
지속가능경영의 미래는 ‘듣는 경영’에 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함께 만들어가는 경영 방식이 앞으로의 표준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와 기업들도 녹서에서 볼 수 있는 의견수렴 방식을 정착시키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진정한 협력의 장을 열어갈 때다.
|심준규.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그린북>,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 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
더솔루션컴퍼니비 심준규 대표
- ⓒ마이데일리(www.mydaily.co.kr).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 300자 이내 / 현재: 0자 ]
현재 총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