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윤세호 기자] 프로야구 드래프트 1차 지명이란 곧 기회를 의미한다.
프로야구 선수에게 있어서 기회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계약금의 가치보다 큰 게 기회다. 2003년 드래프트에서 두산에 1차 지명된 노경은 역시 기회를 얻었다. 당해 전지훈련 명단에 포함됐고 1군 공백시 호출 번호표 앞순번을 지니고 있었다.
루키 시즌 후반기에 1군 마운드를 밟았고 4번 연속으로 선발투수로 경기에 출장했다. 3승 1패 평균자책점 4.12. 야구판을 뒤흔들 정도의 성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1차 지명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성적도 아니었다. 재능의 크기, 혹은 성공의 가능성이 프로적응 속도와 비례하지는 않는다. 특히 1군 투수들에겐 더 그렇다.
하지만 이후 노경은에게 1차 지명이란 기회가 아닌 멍에가 됐을지도 모른다. 2년차에 평균자책점 6점대로 부진했고 당시 프로야구판을 뒤흔든 병역비리에도 연루됐다. 군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계속되는 부진과 함께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1차 지명은 기회를 의미하지 않았다. 경기력 외의 작은 소동을 겪으면서 2010년에는 전지훈련 명단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끝내 꽃피우지 못한 유망주로 사라지는 듯했다.
반전은 일어났다. 2011시즌 그 어느 때보다 팀이 내우외환을 겪으며 침몰하려고 할 때 1차 지명과는 무관한 기회가 주어졌다. 리그 정상급이라 평가받던 두산 불펜이 부상과 외부요인으로 무너지는 것을 바로잡는 역할이었다. 당시 두산 마운드 붕괴는 예측이 안 됐다. 선발도, 불펜도 믿었던 투수가 하나씩 사라져갔다. 1, 2군 사이의 이동이 심하게 반복됐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노경은이 진가를 보였다. 마운드에서 시속 150km에 달하는 직구와 시속 140km가 넘는 슬라이더로 상대 타선을 압도했다. 비로소 팀에 없어서는 안 되는 투수, 모든 프로 선수들의 포부인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됐다. 필승조와 패전조를 가리지 않으며 연투를 거듭, 개인 통산 한 시즌 최다이닝인 62⅔이닝을 던졌다. 시즌 막판 부상으로 인해 9월 10일 이후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지만 노경은에겐 그 어느 해보다 가치 있는 한 해였다.
“지나치게 많이 등판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당시 내 상황이 이런저런 것을 가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좋은 기회가 왔고 자주 등판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나로선 반환점을 맞이할 수 있는 좋은 발판이 된 것 같다. 2012년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노경은은 2003년 프로 입단 후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회의 크기는 줄어들었고 자신과의 싸움은 혹독해졌지만 포기하지 않았기에 실패하지 않았다. 또한 노경은의 뒤에는 정신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힘이 되어준 지도자가 있었다.
“그동안 마음속에서 야구를 놓지 않고 있었다. 야구가 안 되도 야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실전에 못나가도 꾸준히 연습했다. 무엇보다 2군을 지도하시던 김진욱 감독님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김 감독님이 없었으면 야구를 놨을 것이다. 김 감독님이 정신적으로 힘이 많이 되어 주셨다. 고속 슬라이더도 김 감독님이 가르쳐주셨다. 원래 나는 슬라이더가 없는 투수였다. 슬라이더를 던지면 마치 커브처럼 힘이 없었고 구속도 안 나왔다. 그런데 김 감독님이 커터식으로 던지면서 스윙 각을 꺾어 던져보라고 하셨고 이후 고속 슬라이더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팔스윙도 줄였다. 스윙폭이 줄었음에도 구위는 더 좋아졌다. 프로와서 9년을 던졌는데 이제야 내 폼을 찾게 됐다.”
노경은은 9년 만에 자신의 재능을 마운드 위에서 뽐냈고 연봉협상에선 팀내 최다인상률인 90%를 기록했다. 그리고 프로 10년차에는 고난을 함께하며 자신을 이 자리까지 밀어준 은사와 그라운드에 서게 됐다. 그만큼 2012년을 바라보는 노경은의 포부는 남다르다.
“많은 일을 겪으면서 이제는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됐다. 예전에는 마냥 운동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단호하게 미래를 바라보는 법을 알았다. 아직 전지훈련 명단이 나오지 않았는데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선발, 혹은 불펜 특정 자리를 고집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단 작년처럼 많은 기회를 받을 수 있게 몸상태를 올려놓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2012년은 내가 감독님께 보답하는 해로 만들고 싶다.”
[두산 노경은. 사진 = 마이데일리 DB]
윤세호 기자 drjose7@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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