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인배의 두근두근 시네마]
헝클어진 머리에 고통스런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이 눈을 뜨면 절망적인 표정 뒤로 죽은 새들이 사방에서 떨어진다.
피터 브뤼겔의 명화 '눈 속의 사냥꾼'이 화면 가득 채워지고 지구와 멜랑콜리아 행성이 인서트 된다. 푹푹 빠지는 초원 위를 아들 리오를 안고 필사적으로 뛰는 클레어(샬롯 갱스부르)와 앞으로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쓰러지는 말의 인서트 다음에 대저택을 배경으로 웨딩 드레스를 입은 저스틴과 그녀의 어린 조카 레오 그리고 저스틴의 언니 클레어, 세 사람 뒤에 세 개의 달이 몽환적이면서도 신비롭게 떠있는 장면이 보여진다. 이윽고 지구와 거대한 행성이 충돌하고 지구는 폭발한다.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서곡을 배경음악으로 일련의 시퀀스와 스틸, 슬로우모션의 인서트로 8분 동안 펼쳐지는 영화 '멜랑콜리아'의 오버추어(OVERTURE)는 현실인지, 악몽인지, 아니면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초현실적인 꿈인지, 충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지구 종말의 비전을 각인시킨다.
"나는 항상 오버추어의 아이디어를 좋아해 왔다. 거기서 몇 가지 테마를 발견한다. 그리고 전형적으로 우리는, 플롯 자체는 단지 클로즈업에서 재앙을 암시하지만 그러한 충돌에서 일어나리라고 생각되는 어떤 것의 특수효과의 이미지를 만들곤 한다. 그러한 이미지를 맥락에서 빼내 도입부로 삼는 것은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하나의 전체 그림에서 미학적인 면의 집합체이다"라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의도처럼 이 영화의 오버추어는 지구보다 열배 큰 행성이 점점 접근하여 지구와 충돌할 것이라는 결말을 제시하여 시종일관 관객들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근본적인 서스펜스를 제공한다.
이 영화는 2011년 제64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수상이 유력했던 작품 중 하나였지만 기자회견장에서의 라스 폰 트리에의 나치발언으로 아쉽게도 커스틴 던스트의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만족해야 했다. 물론 영화제가 끝난 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나쁜 농담이었다고 진지하게 사과했고 어리석은 바보였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몇 년 동안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털어놨다. 그런 만큼 '멜랑콜리아'는 우울증에 관한 라스 폰 트리에의 판타지이며 지구 종말이라는 암울한 소재를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게 게 그린 수작으로 2012년 전미비평가 협회상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여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영화는 상반되는 두 성격을 지닌 두 자매를 주인공으로 제1장과 제2장으로 구성된다.
제1장 저스틴은 우울증에 걸렸지만 유능한 광고 카피라이터인 저스틴이 신랑 마이클(알렉산더 스카스가드)과 함께 언니 클레어와 형부 존(키퍼 서덜런드)이 마련한 결혼 피로연에 참석하기 위해 대형 리무진을 타고 가다가 길이 좁아 난관에 봉착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런 와중에도 신랑신부는 사랑이 충만하고 행복 해 한다. 약속한 시간보다 2시간 늦게 도착한 저스틴은 언니의 원망을 들으면서 저녁하늘 별들 사이로 빨갛게 빛나는 별을 주시한다. 연회가 시작되고 파티가 무르익을수록 저스틴은 극도의 우울감과 불안감에 빠져 무기력 해 지고 이상행동을 보이며 결국 결혼을 망치고 만다. 그리고 빨간 별이 사라진 하늘을 보며 저스틴은 더 불안 해 한다.
제2장 클레어에서 파혼한 뒤 상태가 심해진 저스틴은 사려 깊고 사회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언니 클레어 집에서 함께 살게 되고 언니의 극진한 간호를 받는다. 그런데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의 거대한 행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클레어는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만 과학자의 말을 맹신하는 남편 존 때문에 내색하지 못한다.저스틴은 날이 갈수록 더 이상행동을 보이고 클레어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다.
다행히 멜랑콜리아는 지구를 지나쳐 멀어지는데 대다수 과학자들의 긍정적 전망과 달리 지구의 종말을 예측하는 저스틴은 "지구는 사악 해. 애석 해 할 필요 없어. 아무도 못 피해. 두려워 하지마. 그저 이치일 뿐이야"라면서 언니의 불안을 가중시킨다.
18홀의 골프 코스가 있는 대저택을 배경으로 지구 최후의 날이라는 극한 상황에 대응하는 두 자매의 심리를 그린 이 영화는 제1장 저스틴으로부터 전이된 불안과 초조, 그리고 공포감을 부각시키면서 제2장에선 지구의 충돌을 앞두고 이성적인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을 극도의 불안감에 빠지게 한다.
우울증(Melancholia)을 뜻하는 제목이 암시하듯 우울한 기운으로 시작해 암울한 결말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장엄하면서도 웅장한 미장센으로 인간의 본성을 고찰한다. 우울증으로 인한 저스틴의 불안과 기행, 지구 종말에 대한 클레어의 불안과 공포를 통해 지구 종말이 온다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전 지구적 집단 신경증을 부각시켜주는 이 영화의 포인트는 존 에버렛 밀레의 '오필리아의 죽음'을 응용한 영상과 피터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 카라바지오의 '골리앗 머리를 든 다비드' 등 영화에 등장하는 미술 작품 같은 회화적이면서도 탐미적인 영상에 있다.
'2012'나 '노잉', '투모로우' 등 일련의 재난영화에서 스펙타클로 보여지는 처절한 아비규환보다는 폭풍전야처럼 고요하면서도 아름다운 정적 속에서 각인되고 전이되는 클레어와 더스틴의 불안 심리와 공포심은 훨씬 더 크고 끝까지 가슴 조이게 한다.
무엇보다 '어둠 속의 댄서'와 '도그빌'등으로 매번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선 보여왔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창의성과 마치 초현실주의 회화를 보는듯한 영상미학이 뛰어나다. 특히 도발적이면서도 논쟁적이었던 다른 작품들 보다 훨씬 부드러운 이 영화의 꽃은 저스틴 역의 커스트 던스트와 클레어 역의 샬롯 갱스부르이다.
이미 2009년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샬롯 갱스부르는 커스트 던스트와 함께 잊혀지지 않는 열연을 보여준다.
반드시 극장에서 대형화면으로 봐야 절실히 체감할 수 있는 이 영화는 놓치기 아까운 두근두근 시네마이다.
<고인배 영화평론가 paulgo@paran.com>
[영화 '멜랑콜리아' 스틸컷. 사진 = 익스트림필름 제공]
김미리 기자 km8@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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