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인배의 두근두근 시네마] 고전 로맨스 소설 중 시대를 초월하여 지속적으로 사랑받으며 영화화 되고 있는 작품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이다.
에밀리 브론테와 샬롯 브론테는 친자매로 에밀리는 언니 샬롯보다 2년 뒤인 1818년, 영국 요크셔 지방 손턴에서 영국 국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 역시 건강악화로 사망했다. 셋째 샬롯과 막내 앤이 교사 생활로 집을 자주 떠났던 것과 달리 넷째 에밀리는 주로 집에 남아 고독을 즐겼다.
1846년 샬롯과 에밀리, 앤 세 자매는 필명으로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집'을 자비로 출판하였고 1847년 샬롯의 '제인 에어',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 앤의 '아그네스 그레이'를 차례로 출간했다.
에밀리 브론테가 세상에 남긴 작품은 미완성작을 포함한 193편의 시와 소설 한 편이 전부였다. 얼마 되지 않는 이 작품들은 그녀가 죽고 반세기가 지난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많은 문학인들과 비평가들에 의해 재평가 받기 시작했고 '폭풍의 언덕'은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비교되면서 '리어왕'과 허먼 멜빌의 '모비딕'과 함께 영문학 3대 비극으로 선정됐다.
'폭풍의 언덕'은 황야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워더링 하이츠와 아늑한 평원에 자리 잡고 있는 그레인지를 배경으로 그 두 저택에 살고 있는 대조적인 성격의 두 집안, 즉 언쇼가와 린턴가의 몰락과 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기에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격정적이고도 파괴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중심축을 이루는데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두 사람의 가슴 저린 사랑이 오랜 여운을 남긴다.
전반부는 랙우드가 후반부는 하녀 넬리 딘이 '폭풍의 언덕'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는 것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1801년 어느 폭설이 내리던 날, 스러시크로스 그랜지라는 곳에 집을 빌린 랙우드가 집주인 히스클리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폭풍의 언덕'으로 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폭설이 그칠 줄 모르자 랙우드는 이날 밤 그 집에 머물고 가기로 한다. 한참 잠이 든 심야에 그는 묘령의 여인의 통곡 소리를 듣게 되고 공포에 사로잡힌다. 다음날 랙우드는 집안의 하녀 넬리 딘으로부터 폭풍의 언덕에 얽힌 기구한 사연을 듣게 된다.
영국 요크셔 지방, 황량한 들판의 언덕 위에 외딴 저택 워더링 하이츠가 있다. 그곳의 주인 언쇼는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리버풀에서 고아소년 히스클리프를 데려온다. 언쇼의 아들 힌들리는 일방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하지만 딸 캐시는 마치 운명처럼 히스클리프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언쇼가 죽은 후 힌들리의 학대가 시작되고 캐시가 근처 대저택의 아들인 에드가와 결혼하게 되자 히스클리프는 말없이 워더링 하이츠를 떠난다. 몇 년 후 부자가 되어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처절한 복수를 시작한다.
필자가 '폭풍의 언덕'을 처음 접한 것은 1960년대 초등학교 시절에 보았던 김지미 주연의 한국영화 '눈보라 고개'(1960)를 통해서였다. 한국판 '폭풍의 언덕'인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음산한 분위기와 귀신이 출몰하는 장면으로 연결되면서 벌벌 떨면서 보았던 공포영화로 각인됐다.
그 이후, 중학교 시절에 재수입돼 극장에서 개봉했던 '벤허'의 명감독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39년도 작품인 '哀情'('폭풍의 언덕'의 한국 개봉 제목)을 통해 강렬한 사랑의 비극인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제대로 알게 됐다.
원작소설의 앞쪽 부분인 캐시의 죽음까지만 각색해서 영화화한 '애정'은 로렌스 올리비에와 멀 오베론 주연의 흑백영화로 작품의 구성과 원작의 대사를 그대로 사용하여 지금까지 영화화된 '폭풍의 언덕' 중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1920년 무성영화로 최초로 영화화된 '폭풍의 언덕'은 1954년 세계적인 명감독인 루이스 부뉴엘(1954년)과 자크 리벳(1985년)이 영화화 했고 1970년, 1978년, 1992년, 1998년 영국 LWT(London Weekend Television)프로덕션에서 3부작으로 제작한 TV영화, 2009년 bbc TV영화 등이 있지만 국내에 개봉되어 잘 알려진 영화는 소설의 반을 영화화하여 수작으로 평가받는 1939년의 '애정'과 원작소설 전체를 영화화했지만 범작으로 머문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1992년도 작품이다.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뮤지컬 등 다양한 모습으로 재탄생한 '폭풍의 언덕' 중 최신작인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2011년도 작품은 전혀 다른 새로운 감각의 영화로 놓치기 아까운 수작이다.
2005년 단편영화 '말벌'로 아카데미와 선댄스영화제에서 수상했으며, 2006년 장편 데뷔작인 '레드 로드'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으면서 단숨에 주목 받는 신인감독의 대열에 오른 안드레아 아놀드는 2009년 두번째 장편 '피쉬 탱크'로 다시 한 번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특히 그녀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 '폭풍의 언덕'은 2011년 베니스영화제 촬영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토론토영화제와 선댄스영화제 그리고 로테르담영화제 등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 상영돼 큰 화제를 모았다.
단 세 편의 작품만으로 칸과 베니스를 석권하고 2012 칸영화제 심사위원에 오른 안드레아 아놀드는 1961년 영국 출생으로 연출이 아닌 TV드라마 배우로서 경력을 시작했으나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 수학한 후 영화감독의 길에 들어선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로 가장 파워풀한 여성 감독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은 히스클리프 역에 흑인 비 전문배우를 기용하고 1939년의 '애정'처럼 원작소설의 반만 취하여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최대한 상세하게 재현한다. 그런 만큼 어린화자를 통해 섬세한 감수성이 각인되는 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다. 역대 그 어떤 작품보다도 관능적이고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얻은 이 영화는 신인배우들을 캐스팅하여 기존의 로맨스시대극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섬세하고 개성적인 연출로 오감에 호소하는 감각적이고 매혹적인 이미지의 향연인 '폭풍의 언덕'을 보여준다.
히스클리프가 죽은 캐서린을 잊지 못해 몸부림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황량한 광야와 드넓은 초원을 휘감는 바람과 안개이다. 화자의 입을 통해 폭풍의 언덕의 사연이 드러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 영화는 곧 바로 히스클리프의 과거회상으로 들어간다. 129분의 런닝타임 중 히스클리프가 에드가의 청혼에 고민하는 캐서린을 오해하고 폭풍의 언덕을 떠나는 장면까지 절반인 1시간 이상을 청소년기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을 내세워 야성적이면서도 본성에 가까운 순수성을 각인시켜주는 이 영화는 그런 만큼 성인 캐서린 역의 카야 스코델라리오와 성인 히스클리프 역의 제임스 호손의 존재감이 생경스럽게 느껴지지만 사랑의 열정과 광기 그리고 증오와 고통을 대사 대신 흔들리는 촛불과 덜컹거리는 문, 거친 숨소리와 황야를 가로지르는 바람 그리고 줄기차게 내리는 비와 진눈깨비로 질척이는 대지 등, 사계를 담은 자연의 이미지와 소리로 대치하는 이 영화의 매혹적인 비쥬얼과 잘 어울린다.
끊임없이 부는 바람과 영국 북부 지방의 황량함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배경음악 없이 캐서린과 일꾼들이 부르는 독특한 멜로디의 민요를 통해 거칠고 음울한 분위기를 부각시킨다. 또한 빈번히 등장하는 동물의 사체와 나방, 시든 꽃과 썩어가는 과일 등, 요크셔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적인 일상을 각인시켜 히스클리프의 어리석은 집착과 광기를 부각시켜준다. 무엇보다 감상성과 낭만성을 배제하고 당시 요크셔 지방의 거친 풍경과 히스클리프의 황량한 내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의 핸드 헬드 촬영 기법은 캐릭터가 느끼는 정서를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한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들은 잊지못할 예술적 감흥을 고취시켜준다. 회초리로 상처입은 히스클리프의 등을 입술로 치료하는 캐서린의 진정한 사랑이 깊은 인상을 주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청소년기의 두 연인이 질퍽대는 대지 위를 뒹굴며 흙과 범벅이 된 채 자연과 합일하는 장면으로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라는 자연의 이치와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사랑을 각인시켜준다.
<고인배 영화평론가 paulgo@paran.com>
[영화 '폭풍의 언덕' 스틸컷. 사진=찬란 제공]
배선영 기자 sypova@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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