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인배의 두근두근 시네마]
소시오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자)아들을 둔 어머니의 독백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거실 창문이 열려있고 하얀 커튼이 바람에 휘 날린다. 창문 밖으로 카메라 접근하면 밖은 온통 하얗다.
장면이 바뀌면 발을 디딜 틈도 없이 운집한 군중들이 서로 토마토를 던지며 축제를 즐기고 있다. 그 인파 속에 한 여인이 번쩍 들려져 으깨진 토마토 액체 속에 잠긴다. 피처럼 붉고 응어리진 토마토 즙과 으깨진 덩어리들이 여인의 얼굴과 몸을 적신다. 그 여인은 에바(틸다 스윈튼)이다.
에바가 사는 집은 지붕은 물론, 외벽 전체에 누군가가 끼얹은 붉은 페인트로 흉물스럽다. 더욱이 에바의 자동차 앞 유리도 붉은 페인트로 범벅이 되어 있다. 그리고 거리에서 만난 중년 여인은 에바에게 쌍욕을 하며 지옥에나 가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하얀 커튼이 바람에 휘 날리는 오프닝으로 시작되는 린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는 에바가 꾼 악몽 속 토마토 축제와 누군가 끼얹은 붉은 페인트가 피범벅을 연상시키면서 불안하게 전개된다.
여행사에 출근하고 교도소에 아들의 면회를 가는 에바의 현재를 중심으로 남편 프랭클린과의 사랑과 임신, 그리고 출산을 하고 케빈을 키우는 에바의 과거는 물론, 케빈이 사건을 저지른 날의 상황들이 맞물리고 교차되면서 이 영화는 철저하게 에바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그런 만큼 에바의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며 조금씩 드러나는 이야기와 사건들은 관객들을 불편하게 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흡인력으로 지옥에 떨어진 에바의 혼란스러운 내면과 절망을 공유하게 한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자유로운 삶을 즐기던 에바는 전형적인 미국적 사고방식을 가진 프랭클린을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원치 않는 임신 끝에 케빈을 낳지만 어머니로서의 기쁨보다는 보편적인 모성에 대한 거부감과 양육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러한 에바의 심정을 아는 지 케빈은 비정상적으로 계속 울어댄다.
캐빈의 울음소리를 공사장 소음으로 잠식시키는 에바의 신경증은 케빈이 걷기 시작하고 말을 배우면서 강박증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맨 처음 배우는 말이 엄마라는 단어인데 어린 케빈은 엄마라고 부르는 걸 거부한다.
누구보다 아빠와는 절친하고 귀여운 아들인 케빈은 자라면서 사사건건 에바의 말을 거역하고 반항하면서 그녀를 괴롭힌다. 에바는 유독 자신에게만 마음을 열지 않는 케빈과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지만 그럴수록 케빈은 잠재된 폭력성을 드러내며 교묘한 방법으로 엄마에게 고통을 준다. 남 앞에선 우등생이며 온순한 양 같은 케빈(이즈라 밀러)은 날이 갈수록 에바와 여동생 실리아에게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케빈의 이중성을 아는 에바는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케빈에 대한 에바의 강박증이라고 생각한 남편은 이를 무시한다.
평소 정원에서 아빠와 활을 쏘는 걸 즐기는 케빈을 불안 해 하던 에바의 삶은 케빈이 저지른 끔찍한 일로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2003년에 발표되어 2005년 오렌지 상을 수상하고 2006년 BCA 크라임 스릴러 후보작으로 선정된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소설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는 모성 이야기와 심리 스릴러가 절묘하게 혼합된 작품으로 '소시오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자)아들을 둔 어머니의 독백'이라는 충격적이고 독특한 설정으로 독자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수많은 논쟁의 중심에 섰고, 입소문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모성을 모독하듯 아기를 낳기 싫어하는 엄마, 그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와 주변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아들, 돌이킬 수 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모자의 이야기인 이 작품은 살인자인 아들을 둔 어머니의 갈등을 그린 봉준호 감독의 '마더'와 콜럼바인 총기 난사사건을 그린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린 램지 감독은 '소시오패스와 가족'이라는 사회문제와 심리 스릴러를 결합시킨 원작에서 사회적인 이슈보다는 모자의 실패한 애착관계에 포인트를 둬 에바의 희망이 상쇄되는 과정을 통해 에바의 심리를 극명하게 각인시킨다. 그런 만큼 관객들은 에바의 기억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는 과거의 사건들을 통해 그녀와 동일시되어 케빈과의 싸움에 동참하지만 에바처럼 케빈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 지 짐작만 할 뿐,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
기억을 따라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구성방식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은유와 상징이 함축된 이미지를 연결하는 편집과 강렬한 붉은 색감으로 언제 분출할 줄 모르는 뜨거운 욕망과 파국의 전모에 대한 불안감으로 극도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특히 공사장과 일상의 소음은 에바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극명하게 부각시킨다.
이 영화 전편을 통해 이러한 불안과 긴장을 희석시켜주는 것은 로니 도니건의 'MULE SKINNER BLUES', 'HAM N EGGS', 웸의 'LAST CHRISTMAS' 등, 익히 알려진 추억의 팝송들이다. 이 음악들 역시 에바가 처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경쾌한 음악들이지만 에바의 심리를 대변 해 준다.
회사 사무실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할 때 흐르는 웸의 'LAST CHRISTMAS'는 에바의 과거와 교차되면서 행복했던 에바 가족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직접적으로 부각시키고 에바가 케빈 면회하러 갈 때 흐르는 음악 'NOBODY'S CHILD'는 아들의 외로운 내면을 듣고 싶어하는 에바의 바램과 상통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꽃은 에바 역의 틸다 스윈튼이다. 헌신적인 모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공허한 눈빛과 세심하게 떨리는 창백한 표정은 아들과의 감정적 폭력과 학대로 얼룩진 에바의 내면과 모자의 그릇된 얘착 관계로 인한 비극적 파멸을 각인시킨다. 케빈의 아역들도 섬뜩한 여운을 주지만 싸늘한 표정과 음흉한 미소로 숨통을 죄는 십대가 된 케빈 역의 이즈라 밀러 역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무한한 사랑으로 대표되는 모정의 보편성을 뒤틀어 현대적인 여성들의 모습을 부각시킨 이 영화는 모자의 잘못된 관계가 엄마의 사랑과 이해의 부족이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물론 아이를 불편 해 하는 에바와 괴물처럼 구는 아들 케빈의 문제는 단절된 대화에 기인하지만 그것 역시 속 시원한 해답이 아니다.
비록 원하는 임신이 아니었고 출산을 기뻐하지 않았지만 케빈을 원만하게 낳았고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러하듯 에바 역시 하루종일 케빈을 돌보면서 남 부러울 것 없이 키운다. 그렇다고 가정 내의 불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편은 에바와 케빈을 끔찍이 사랑한다. 그런데 케빈의 상태는 엄마가 예상하지 못할 만큼 점점 심각해지고 결국 에바는 지쳐 단지 아들에 대한 의무감으로 케빈을 대하게 된다.
엄마와 관계를 형성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케빈의 그런 행동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엄마를 독차지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이디프스 콤플렉스 적인 해석도 가능하지만 이 영화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어떤 결여나 상실이라는 보편적인 설명을 거부하면서 인간의 삶엔 정답이 없고 원인이 없는 결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이 영화에서 에바가 케빈과 진정한 모자 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에바가 케빈 침대에서 동화 '로빈훗'을 읽어 줄 때이다. 줄곧 아빠를 따르는 케빈이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을 고집하며 애정을 보이는 것은 이 장면뿐이다.
그런 다음 날부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에바에게 냉정해지고 아빠와 정원에서 활을 쏘는 것을 즐기는 케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에바가 읽어준 동화책을 통해 활에 흥미를 느끼고 아빠가 선물한 활로 인해 활쏘기가 취미가 된 캐빈의 살인 동기는 과연 무엇일까? 엄마 에바 탓일까?
다른 사람들은 아들을 악마로 키웠다고 에바에게 손가락질하고 에바 역시 어느 날 찾아온 선교사들이 사후에 대해 물었을 때, 곧장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겪을 거라고 단언한다. 그러한 고통을 짊어지고 힘들게 살아야하는 그녀의 삶에 한줄기 희망의 빛은 어디에 있을까?
사건이 조금씩 드러나는 영화 전반을 통해 에바가 집 외벽 페인트를 벗겨내고 핏물 같은 붉은 페인트로 범벅이 된 걸레를 빠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보여지는 이 영화는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에바의 집도 깨끗하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사건 발생 2년 후인 18세 생일을 앞둔 케빈이 성인교도소로 이송되기 전, 면회 온 에바가 케빈에게 왜 그랬는지 물었을 때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라는 케빈의 대답과 케빈을 포옹하는 에바의 행동은 가슴 아픈 감동을 주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고 또 케빈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게 해 준다.
공포 영화보다도 더 섬뜩한 '케빈에 대하여'는 결코 놓쳐선 안 될 두근두근 시네마이다.
<고인배 영화평론가 paulgo@paran.com>
[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컷. 사진 = 티캐스트 제공]
김미리 기자 km8@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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