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마이데일리 = 조인식 기자] 이제 박찬호(39)를 보내야 할 시간이 왔다.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박찬호의 향후 거취를 둘러싸고 무성한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더 이상 마운드 위에 선 박찬호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졌다.
박찬호는 이번 결정을 통해 한양대 시절 LA 다저스와 계약을 맺고 처음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랐던 1994년부터 19년 동안 입고 있던 프로 유니폼을 벗었다. 마지막 모습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충분히 한국 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는 대활약이었다.
박찬호는 시작부터 한국 야구의 자존심을 살렸다. 계약금으로는 당시 1라운드 지명 선수 수준의 계약금인 120만 달러를 받았고, 사상 17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직행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강타자로 명성을 날렸던 존 올러루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잠시 메이저리그를 맛본 뒤 마이너리그의 쓴맛을 봤지만, 박찬호가 다시 돌아오는 데는 만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기회를 박찬호는 놓치지 않았다. 박찬호의 선발등판 경기는 전국민을 열광시켰고, 박찬호와 함께 마이크 피아자, 라울 몬데시 등이 있던 다저스는 국민 구단이 됐다.
메이저리그에서 여러 구단을 거쳤지만, 역시 하이라이트는 다저스 시절이었다. 박찬호는 다저스에서 97년부터 2001년까지 풀타임 선발투수로 뛰며 2000년 18승을 올리는 등 5년간 75승을 올렸다. 다저스에서 올린 승수를 모두 합하면 84승으로 다저스 프랜차이즈 통산 26위다. 1884년에 시작된 팀 역사상 26번째로 많은 승리를 올렸던 것이다.
태극마크를 달고도 대표팀에서 든든한 역할을 했다. 1998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메이저리거의 위용을 뽐내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2006년 제 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도 대한민국의 4강 신화를 견인했다. 특히 일본을 두 번이나 꺾는 과정에서 박찬호의 역할은 지대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몸담고 있던 2006년 이후 다시 메이저리그에서 풀타임 선발로 뛰는 박찬호를 볼 수는 없었지만, 불펜 투수로도 여전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7년 다시 마이너리그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고 난 뒤 2008년 다저스에서 부활한 박찬호는 2009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월드시리즈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박찬호는 필라델피아의 셋업맨으로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는 피칭을 했다.
2010년 양키스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거치며 노모 히데오가 세운 아시아인 메이저리그 최다승(123승)을 넘어 124승으로 새 기록을 쓴 박찬호는 일본(오릭스 버팔로스)을 거쳐 올해 한국 무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IMF로 나라가 어려울 때 전국민을 TV앞에 모여들게 했던 다저스 시절, 어엿한 메이저리그의 에이스가 되어 특급 대우를 받던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을 거쳐 첫 트레이드의 아픔을 겪고 샌디에이고로. 텍사스에서 맺은 계약이 샌디에이고에서 만료되자 뉴욕 메츠와 계약했지만 1경기를 끝으로 물러나 휴스턴 애스트로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재기의 뜻을 벼르던 시절. 그리고 다시 다저스, 필라델피아, 양키스, 피츠버그와 오릭스, 마지막으로 한화까지. 우리는 박찬호와 함께 호흡하며 울고 웃었다.
시속 150km를 훌쩍 넘는 강속구를 뿌리며 거칠 것이 없던 젊은 시절부터 내리막, 그리고 재기와 은퇴. 파란만장했던 박찬호의 야구인생 1막은 전국민이 함께 보는 드라마였다. 이제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마음을 졸이기도 하고 때로는 애가 끓었지만, 돌아보면 정말로 행복했던 19년이었다.
[다저스-06 WBC 대표팀-필라델피아-오릭스-한화에서의 박찬호. 사진 = gettyimagesKorea/멀티비츠-마이데일리 사진DB]
조인식 기자 조인식 기자 nick@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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