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인배의 두근두근 시네마]
하얀 눈 같은 순백의 첫사랑! 발렌타인 데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겨울 영화.
눈 내리는 설원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여인 와타나베 히로꼬. 순간 오래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일어선 그녀는 하늘을 쳐다보며 눈을 감는다.
그것은 2년 전, 겨울 산에서 조난당해 숨진 자신의 약혼자 후지이 이츠키가 차가운 설원에서 생명의 불이 꺼져가며 느꼈을 고통과 그가 처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은 그녀의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다.
이윽고 옷에 묻은 눈을 털고 눈 덮인 설원을 가로질러 약혼자의 묘가 있는 마을로 내려가는 히로꼬.
그녀의 모습이 하얀 눈이 덮이고 정적이 깃든 마을 어귀에서 사라질 때까지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타이틀 씬으로 시작되는 '러브레터'는 올드 팬들이 겨울 영화로 손꼽는 '닥터 지바고'와 ' 러브 오브 시베리아'처럼 겨울이면 떠오르는 겨울 영화로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1995년부터 불법복제 비디오로 이미 국내에서 수많은 메니아층을 형성한 '러브레터'는 1998년 일본문화개방과 함께 1999년 뒤늦게 국내 개봉되었지만 일본영화로는 최초로 140만 명 관객을 모으며 그 해 한국의 겨울을 “오겡끼데스까(잘 지내시나요)”라는 가슴 저릿한 외침으로 물들이며 패러디 열풍을 일으켰다.
그것은 섬세한 감수성과 미려한 영상으로 일상을 포착한 이와이 ??지 감독의 감성적인 연출과 당대 최고의 여배우 나카야마 미호의 절묘한 1인 2역 연기, 그리고 애잔한 스토리와 아티스트 리메디오스(Remedios)의 'A Winter Story', 'Forgive Me', 'Small Happiness' 등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이 담긴 음악이 하얀 눈 같은 순백의 첫사랑과 잊혀진 기억의 아련한 추억을 부각시켜 최고의 감성멜로로 꼽혔기 때문이다.
절제된 슬픔을 통해 감성을 자극하는 '러브레터'의 이와이 ??지 감독은 뮤직비디오와 TV 드라마 감독으로 일하다가 1994년 '언두'로 베를린영화제 넷팩상을 수상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그는 베를린영화제 포럼부문 초청작이었던 '피크닉'에서 아웃사이더들의 환상적이고 슬픈 데이트를 달콤하고도 잔혹하게 그린 후 1995년, '러브레터'로 일약 스타감독으로 도약하였고 '4월 이야기'(1998)와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 '하나와 앨리스'(2004)등이 국내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으면서 사랑의 메신저로 각인되었다.
2년 전 조난 사고로 약혼자 후지이 이츠키를 잃은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 분)는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이츠키의 3주년 추모식 날, 그의 중학교 졸업 앨범에서 지금은 국도가 되어 사라진 그의 옛 주소(오타루시 제니바코 2-24)를 발견하고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안부 편지를 보낸다.
한편, 고베에서 먼 북쪽도시인 오타루에 사는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 분)는 감기에 걸려 침상에 누워있다가 고베에 사는 와타나베 히로코가 보낸 편지를 받는다.
“후지이 이츠키님, 잘 지내셨어요? 전 잘 지내요. 와타나베 히로코”
폐렴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와 엄마와 함께 살면서 도서관에 근무하는 이츠키는 전혀 모르는 와타나베 히로코에게 호기심으로 답장을 보내고 히로코는 애인인 이츠키가 보낸 편지로 잘못알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오타루에 간다.
결국 오타루에서 편지를 보낸 후지이 이츠키가 자신의 죽은 애인이 아니라, 그와 동명인 여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히로코는 자신과 많이 닮았다는 그녀에게 편지만 남기고 고베로 돌아온다.
히로코가 남기고 간 편지를 읽고 비로서 중학교 시절에 같은 반, 같은 이름이었던 남학생 후지이 이츠키(카시와바라 다카시 분)를 떠올린 여성 후지이 이츠키는 히로코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중학교 입학식부터 이름이 같아서 꼬이기 시작한 두 사람의 이상한 인연의 추억을 떠올린다.
히로코는 그녀의 편지를 통해 자신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약혼자 후지이 이츠키를 서서히 알면서 그의 첫사랑이 누군지 집착하게 되고, 동명이인인 이츠키는 까마득히 잊고 또 잃어버렸던 첫사랑의 추억을 하나씩 찾는다.
이 영화의 최고 명장면은 히로코가 먼동이 트는 새벽에 약혼자인 후지이 이츠키가 조난당한 설산을 향해 “오겡끼데스까?(잘 지내셨어요? ), 전 잘 지내요.”라고 외치는 가슴 저리는 이별의식장면으로 세상을 떠난 첫 사랑에 대한 아련한 슬픔을 각인시키면서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또한 도서관과 자전거, 교복만으로으로도 학창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후지이 이츠키의 중학교 시절은 풋풋한 순수함은 물론, 첫사랑에 대한 설렘을 아름다운 영상미로 부각시켜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꽃은 떠난 사랑을 잊지 못하고 편지를 보내는 와타나베 히로코와 그에게 답장을 보내는 옛 사랑의 동창 후지이 이츠키, 1인 2역을 맡아 서로 다른 인물의 미묘한 감정까지 완벽히 보여줘 호치이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나카야마 미호이다.
이 영화로 첫사랑의 아이콘이 된 그녀는 '도쿄 맑음'(1997), '잠자는 숲'(1998), '2000년의 사랑'(2000), '사요나라 이츠카'(2010), '새 신발을 사지 않으면'(2012)에 출연하여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있다.
또한 히로코가 오타루를 찾으면서부터 중학교 시절에 등장하는 동명이인이며 성별이 다른 후지이 이츠키를 맡은 1977년생 카시와바라 다카시와 1978년생 사카이 미키 역시 깊은 인상을 남겨준다.
커튼이 흩날리는 도서관 창문에 기대서 책을 읽는 소년 후지이 이츠키로 분한 카시와바라 다카시는 이 영화로 상대역인 사카이 미키와 함께 전 일본 아카데미 신인상을 휩쓸었다. 동생 카시와바라 슈지와 함께 밴드를 결성해 지금까지 세 장의 싱글 앨범을 발표하고 콘서트도 성공리에 개최하며 만능 엔터테이너적인 면모를 과시한 그는 현재까지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또한 동그란 눈과 새침한 표정, 갈래머리와 세라복을 입고 해사하게 웃던 여중생 소녀 후지이 이츠키 역의 사카이 미키는 뉴욕유학 당시 만난 남편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유니세프의 홍보대사로 각종 해외 봉사활동과 연극, 영화, 브라운관까지 병행하며 청순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꾸준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중학교 시절, 두 이츠키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에서 소년 이츠키는 소녀 이츠키에게 대신 책을 반납 해 달라면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맡기는데 그 책은 과거의 비밀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물질적 단서로 활용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것은 소년 이츠키의 진솔한 러브레터인 동시에,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며 옛사랑에 대한 아련한 향수이다.
14년 만에 재개봉하는 이 영화의 영상과 음향은 뛰어나며 “오겡끼데스까(잘 지내시나요?) 전 잘 지내요."라는 히로꼬의 외침이 절절이 메아리 되어 가슴을 울린다.
14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러브레터'는 시린 겨울 한복판을 지나 찾아오는 발렌타인 데이와 찰떡궁합인 겨울영화로서 세월을 뛰어넘어 언제보아도 감동을 안겨주는 두근두근 시네마이다.
<고인배 영화평론가 paulgo@paran.com>
[영화 '러브레터' 스틸. 사진 = 조이앤컨텐츠그룹 제공]
배선영 기자 sypova@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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