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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데일리 = 배선영 기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39)는 90년대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은 배우였다. 당시만해도 그에게 배우보다는 스타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렸다. 그러나 2013년 현재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배우다. 그것도 세계적 거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디카프리오를 세계적 스타로 만든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1997)' 이전 그는 조니뎁과 출연한 성장영화 '길버트 그레이프(1993)'와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로 분한 '토탈 이클립스(1995)', 그리고 바즈 루어만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1996)' 등에 출연해 서서히 팬층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가녀린 꽃미모의 디카프리오는 연기를 제법 하는 청춘스타로 기억됐고, 급기야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블록버스터 재난영화 '타이타닉'은 전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하며 그를 세계적 탑스타 반열에 올려놓았다.
7일 내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타이타닉' 이후 내가 원하는 역을 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운이 좋다"라고 말했다. 실제 당시 디카프리오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배우 중 한 명이 됐고, 돈벌이를 위한 상업 영화의 러브콜을 한 몸에 받게 됐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영화들은 작품성보다는 감독의 작가주의적 성향이 짙은 영화들이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거장 감독과 주로 호흡하면서 그 스스로를 성장시켜왔다. 디카프리오는 이미 '디스 보이즈 라이프' 이후 16세 때 1년 동안 영화들을 섭렵하며 속성으로 영화사를 공부했다고 밝혔다. '타이타닉'으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언젠가 거품처럼 사라질 인기에 연연하기 보다 영화적으로 스스로를 성장시키는데 주력하는 작품과 캐릭터를 선택한 것은 이런 과거가 밑받침 돼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뻔한 캐릭터의 반복이 싫어 적극적으로 작품을 찾아나선 자신의 이력도 이야기 했다. 출연제안을 받는 작품들과 캐릭터가 반복적으로 느껴져 직접 제작사를 찾아 작품을 찾아 나섰다고 말했다. 그런 노력은 거장 감독 마틴 스콜세지와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가 수년에 걸쳐 개발하고 각본을 쓰고 감독을 찾아 나선 첫 프로젝트 ‘에비에이터(2004)’의 연출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맡게 된 것이다.
이후로도 디카프리오는 '디파티드(2006)'와 '셔터 아일랜드(2010)', 그리고 개봉을 앞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로 스콜세지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매 작품마다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그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과 호흡을 맞춘 신작 영화 '장고:분노의 추적자'에서는 생애 첫 악역에 도전했다. 사무엘 L.잭슨, 제이미 폭스 등과 호흡을 맞춘 이 영화에서 그는 부의 축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캔디 역을 맡아 옛 미국의 노예제도의 참상을 온 몸으로 표현해냈다.
디카프리오는 "고통은 한 순간이지만 영화는 영원히 남는다.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걸작을 만들 수 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리고 "영화는 현대예술 중 가장 위대한 예술이다. 영화를 볼 때 세상만사를 잊고 영화와 캐릭터에 몰입을 하게 된다. 그렇기에 저는 최대한 최고의 사람들, 최고의 감독들과 일을 하고 싶다"는 자신의 영화 철학과 애정을 들려줬다.
그런 생각 속에서 한 때의 청춘스타는 깊이 있는 배우로 성장했다. 혹자는 미모가 만개한 리즈(전성기) 시절 디카프리오가 방한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내한 기자회견의 모든 질문에서 그의 깊이를 드러낸 디카프리오의 이번 방한은 한국 기자들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사진=한혁승 기자hanfoto@mydaily.co.kr]
배선영 기자 sypova@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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