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연예
모순으로 가득 찬 드라마 외주제작의 세계
태왕사신기는 총 24부작으로 회당 제작원가가 18억 원 정도 투입된 블록버스터 급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애초 SBS에서 방송하기로 하고 제작에 착수했으나 제작이 완료될 무렵까지 해외 판권 등 저작권 문제가 합의되지 않아 끝내 SBS 방영이 무산되었다. 결국 태왕사신기는 김종학 감독의 친정인 MBC에서 방영되었다. 당시 MBC로부터 받은 회당 제작비는 2억 원 선인 것으로 알려졌다. 원가 18억 원짜리 제품을 단돈 2억 원에 팔았으니 태왕사신기는 드라마로는 성공적이었지만 제작사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로 남게 되었다.
‘성공한 드라마 실패한 사업’
이 드라마는 총 48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되었지만 알려진 수익은 2차, 3차 수익을 통틀어 400억 원을 조금 넘는 데 그쳤다. 흥행에 성공하고도 제작사는 쪽박을 차는 이런 사례는 방송가에서는 너무도 흔히, 아주 오래된 관행처럼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와중에 많은 제작사들이 운영난에 허덕이며 아사직전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 이처럼 외주제작의 세계엔 모순이 가득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비싼’ 드라마일수록 ‘싼’ 외주제작사에 맡겨진다?
스타급 출연자가 많아 편당 제작비가 많이 드는 미니시리즈는 방송사에서는 웬만해서는 자체제작을 하지 않는다. 스타급 연예인을 캐스팅해야 하니 돈이 많이 들어 수익성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방송사는 대형손실을 피하기 위해 제작을 외주로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체제작을 할 경우 편당 제작비가 2억 원 이상 든다면 외주제작으로 돌려 편당 1억 5천만 원 정도만 주는 식이다. 일반적으로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에 주는 돈은 전체 제작비의 60~70% 수준이다. 이처럼 손실이 뻔히 보이는데도 제작에 참여하겠다는 외주제작사들이 줄을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작사는 930여개, 채널은 고작 4개...
현행 법정 외주비율은 40% 정도 된다. 이 중 외주를 줄 수 없는 뉴스와 스포츠, 외화 등을 빼고 나면 실제 제작국 프로그램의 70%을 외주를 주어야 정해진 외주비율을 맞출 수 있다. 드라마의 경우 이미 각 지상파의 외주 비율이 70%가 넘은지 오래 되었고 SBS의 경우 드라마 외주비율은 거의 80%에 육박한다. 종편은 아예 100% 외주에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높아진 외주제작 비율은 군소 제작사의 난립을 가져왔다. 전국에 외주제작을 위해 뛰고 있는 제작사는 900여개가 넘으며 이중 드라마를 제작했거나 드라마 제작을 목표로 뛰고 있는 회사는 40개 이상이다. 신생 제작사들은 회사를 설립하고도 오랫동안 편성을 못 받아 실적이 전무한 채로 편성을 따내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몇 년씩 계속해 보지만 방송사의 문턱은 높기만 하다. 믿을 만한 작가나 감독, 혹은 스타급 배우가 사전에 확보되지 않으면 기획안은 검토조차 되지 않기 일쑤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사무실 얻고 직원 뽑아 월급 주며 몇 년씩 버텨보지만 매출은 전무하다. 몇 년씩 실적이 없으니 투자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자금난과 투자자의 성화 등 이런 저런 압박에 몰린 제작사는 형편없는 제작비를 받고도 방송을 낼 수밖에 없는 절망적 상황에 몰리게 된다. 제작 경험이 없는 신생제작사는 방송사의 요구대로 스타급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출연료를 지급한다. 방송사들은 실적 없는 이런 초보제작사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거의 모든 손실위험을 제작사에 떠넘기고,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수익모델은 거의 모두 독차지한다. 이것이 제작 경험이 전무한 제작사에 대작 드라마의 제작을 쉽게 맡기는 이유이다. 그러니 어쩌다 드라마가 대박이 나도 결국 임금이나 출연료 미지급과 같은 문제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제작비가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출연진이나 스태프들이 임금은 제대로 받고 있는지는 방송사의 관심 밖이다. 스태프나 연기자의 임금 미지급사태가 벌어지면 방송사 쪽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것은 제작주체인 외주제작사와 해결할 문제’라는 것이다.
김종학 프로덕션에 김종학이 없다.
제작기간이 2년을 넘은 대작드라마 태왕사신기는 회사에 많은 손실을 안긴 채 막을 내렸고 결국 김종학 감독은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자 자신이 가진 회사 지분을 모두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회사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후 회사 운영은 김감독의 후배인 박창식씨가 맡아왔으며 그는 지금 새누리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벌이고 있다. 결국 태왕사신기는 제작사 대표이자 감독으로 김종학 PD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마지막 드라마가 되었고 이후 김종학 프로덕션은 김종학 감독이 없는, 이름만 김종학프로덕션인 회사가 되어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새롭게 등장한 꼼수 ‘유한회사’
적자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제작을 주는 지상파나 이를 받아 제작하는 제작사나 늘상 반복되는 ‘대박 드라마, 쪽박 제작사’의 상황을 벗어날 길이 없자 결국 새로운 형태의 위험회피 수단을 만들어냈다. 이를테면 단위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이 회사가 제작주체가 되도록 하는 교묘한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이다. 듣기도 생소한 ‘문화산업전문회사’라는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유)선덕여왕, (유)신의 등 생소한 자막이 언젠가부터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제작사 파산 시 아무도 더 이상 책임지지 않겠다는 꼼수에 다름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한회사란 자본금을 모두 잠식하고 나면 회사는 해산되고 운영주체는 더 이상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대규모 손실로 회사가 부도나서 해산되면 그 피해는 미처 임금을 선불로 받을 입장이 못 되는 힘없는 스태프나 조연급 연기자, 하청회사, 보조출연자 등에게 고스란히 떠넘겨지게 된다. 결국 문화산업전문회사라는 이름의 유한회사는 이미 예견된 손실을 힘없는 약자들에게 모조리 떠넘기고 손을 털겠다는 가진 자의 ‘먹튀정신’의 발로에 불과한 것이다.
* 성준기 교수는 ? KBS에서 드라마게임 '우리 동네 면장님'(1992)으로 드라마 연출가로 데뷔해 '밥을 태우는 여자'(1994) '숨은 그림 찾기'(1994)를 연출했고, 이후 SBS로 옮겨 '옥이이모'(1996 백상예술대상 연출상), '달팽이'(1998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은실이'(1998 한국방송PD협회 이달의 PD상) 등을 연출했다. 가장 최근에는 2007년 '가정의 달' 특집극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가지 질문'을 연출, 한국불교 언론문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동아방송예술대학교 콘텐츠학부장으로 재직중이다.
[故 김종학 PD(왼쪽). 사진 = 사진공동취재단]
김세호 기자 fame@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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