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왜 수집했냐고? 그것들이 바로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에!"
종로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전형필은 휘문고보를 나와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스물다섯 되던 해 부친의 타계로 가문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았는데, 당시 조선 3대 부자로 꼽힐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장 값지게 사용하는 법을 깨달았다. 일제로부터 우리 문화재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런 민족의식을 갖게 된것은 일본 유학시절의 경험과 귀국 후 3∙1운동 민족대표 중 한 명이던 오세창을 만나 친분을 나눈 덕분이기도 하다. 서예가이기도 했던 오세창은 그에게 '간송'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작품을 보는 안목을 키워주었다.
우리 장인들이 빚은 도자기, 옛 화가의 그림, 글씨, 조각 등에는 민족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은 전형필.
그는 우리의 유산을 지키는 것은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는 것과 다름없다며 전 재산을 쏟아 문화재를 되찾는 데 힘썼다. 흔히 고려청자라고 불리는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무늬매병>은 1935년에 일본인 골동품 거래상으로부터 당시 한옥 스무 채 값에 해당하는 2만 원을 주고 샀다고 한다. 이후 한 일본인이 값을 두 배로 쳐주겠다고 했으나 단호히 거절했다고. 국보 제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 역시 그가 되찾았다.
그렇게 되찾은 우리 문화재들을 바탕으로 그는 '보화각'을 만들었다. 그것이 오늘날의 '간송미술관'이다. 미술관이지만 소장품을 전시하는 것은 봄, 가을 단 두 차례뿐이다. 방대한 소장품을 한 번에 모두 모여줄 수 없어 주제에 따라 전시하기 ??문에 모든 작품을 다 보려면 몇 해를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선생이 남긴 '위대한 유산'은 소중한 문화재만이 아니다. 그것들을 지킨 선생의 뜨거운 마음이다.
간송 미술관은 1971년 10월부터 해마다 5월과 10월에 정기전(각2주씩)을 열어 소장 문화재를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이 시기가 아니면 소장품을 관람할 방법은 없다. 관람객이 많으므로 아침 일찍 방문하는 것이 좋다.
최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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